by John Berger
사진이 낯선 것은 그것의 주 재료가 빛과 시간이라는 점 때문이다.
말과 함께 찍힌 한 남자의 사진은 별로 말해주는 것이 없다.
제목을 다는 것으로 의미를 만들 수 있겠지.
이 사진이 주는 가장 명확한 정보는 말이 쓰고 있는 굴레 bridle의 종류이지만, 그것이 이 사진이 찍힌 이유는 아니다. 이 사진만 보는 것으로는 그것이 어떤 카테고리에 속해있는 지도 알 수 없다. 가족사진인가, 신문 사진인가, 여행 사진인가?
그 사람 때문에 찍힌걸까? 말 때문에 찍힌 걸까? 이 사람은 말 딜러인가?
이 사진은 그 남자, 말, 굴레가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그 존재들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진은 시간의 흐름 속에 한 찰나를 잡은 것. 모든 사진은 과거이다, unlike a lived past, 사진은 결코 현재로 연결될 수 없다. 모든 사진은 두개지 메시지를 준다: 사진 찍힌 사건과 관련한 메시지 그리고 불연속성의 소크와 관련한 메시지.
사진이 찍힌 순간과 사진을 보는 현재의 순간 사이에 심연이 있다. 우리는 사진에 워낙 익숙해서 그 두 번째 메시지를 더이상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 사진에 찍힌 사람이 아는 사람이고 지금 멀리 있거나 죽었을 때.
그런데 그 사람이 낯선 사람일 경우 우리는 첫 번째 메시지만 생각한다: 여기서는 너무 불명확해서 사건은 우리로 부터 벗어난다.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할것인지 선택하면서 만들어진다.
이 사진의 미스터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어내지지 않는 이야기나, 설명되지 않은 사실도, 그 외양만큼이나 현재적이다. 이 외양은 말해주는 것이 거의 없지만, 의문의 여지가 없다.(뭔 소린지 잘 모르겠다)
최초의 사진들은 경이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사진은 다른 어떤 시각적 이미지보다 직접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무엇인가의 외양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사진은 사물의 모습을 보존했고 그것을 옮겨다닐 수 있게 했다. 이 경이로움은 단지 기술적인 것 만은 아니다.
외양에 관한 우리의 반응은 아주 심오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 본래적이고, 본능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예를들어 외양(appearances)만으로 성적인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더 폭넓게는, 세계의 모습은 그 세계가 거기 있음에 대한 확증이다, 그래서 그 세계의 모습이 우리의 그 거기있음에 대한 관계(우리의 존재에 대한 감각을 풍부히하는)를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확인시킨다.
말과 함께 있는 남자의 사진을 읽으려고 시도하기 이전에, 그것을 보는 단순한 행위는 내가 세계에 있음을, 그것의 남자들과, 모자들과, 말들과, 굴레들과…, 느끼는 것을 확인시킨다.
사진의 불확실성은 사진이 찍히는 그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에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덜 불확실하다. 경주의 사진판정은 카메라가 무엇을 기록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불확실성은 사진의 두 번째 메시지를 발생시키는 그 불연속성 때문에 일어난다.(사진이 찍히는 순간과 보는 순간의 심연)
사진은 시간의 한 순간을 기록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워지는 것을 막는다. 이 점 때문에 사진은 기억 속의 이미지와 비교할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기억된 이미지는 연속적인 경험의 잔류물임에 반하여, 사진은 끊긴 순간의 외양을 격리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에 있어서 의미는 즉각적이지 않다. 의미는 연결에서 발견되고, 발전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야기 없이, 전개 없이,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들, 정보는 의미를 자신 안에 갖고 있지 않다. 사실들은 컴퓨터 안에 넣어질 수 있고 계산의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의미도 컴퓨터로부터 발생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사건에 의미를 부여할 때는 그 의미는 알고 있는 것에 대한 그리고 알지못하는 것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의미와 미스터리는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둘 중 어떤 것도 시간의 흐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확신은 즉각적일 수 있다; 의문은 기간(duration)을 필요로 한다; 의미는 그 두가지에 기안한다. 사진이 찍힌 순간은 보는 사람이 그 순간을 넘어전 시간을 읽을 수 있을 때만 의미가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사진에서 의미를 찾을 때는 그것에 과거와 미래를 부여한다.
프로페셔널사진가가 사진을 찍을 때는 사람들이 그 순간에 적절한 과거와 미래를 부여할 수 있는 어떤 시점(순간)을 선택한다. 그런데 이야기꾼이나 화가, 연기자와 달리 사진가는 사진 찍을 순간을 결정하는 하나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래서 사진은 다른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달리 의도적인 면에서 약하다.
드라마틱한 사진은 그렇지않은 것 만큼이나 애매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건의 중요성을 이해하기위한 설명이 필요하다. "책을 태우는 나치" 그리고 그 설명의 중요성은 다시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이해도(보장할 수 없는)에 달려있다.
모든 사진은 애매하다. 모든 사진은 연속성으로 부터 가져온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건이 공공의 사건이면, 그 연속성은 역사이다; 만약 개인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삶의 이야기이다. 순수한 풍경사진 조차도 연속성을 파괴한다: 빛과 날씨. 단절은 항상 불명확성을 만들어낸다. 그 불명확함 조차도 명확하지가 않다. 사진이 단어와 함꼐 사용되자마자, 그것들은 함께 명확함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독단적인 주장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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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사진의 그 불명확함이 사진을 어떤 독창적인 표현 수단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 불명확함이 이야기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을까?
카메라는 외양(appearances)를 운송하는 상자이다. 그 원리는 변하지 않았고 기술은 간단하다. 그런데 여전히 간단하지 않은 것은 카메라가 전달하는 그 외양의 속성이다.
그 외양은 사람이 만든 문화적 artifact이기도 하고, 자연의 흔적이기도 하다.
사진가는 사진찍을 사건을 선택한다. 그 선택은 문화적 구성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건이 찍힌 사진 이미지가 사진으로 보여질 때 또한 그것은 문화적 구성이다. It belongs to a specific social situation, the life of the photographer, an argument, an experiment, a way of explaining the world, a book, a newspaper, an exhibition.
그리고 동시에 그 이미지와 그것이 나타내는 것과의 물질적 관계(between the marks on the printing paper and the tree these marks represent)는 즉각적이고 비구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흔적같은 것이다.
사진가는 나무를 선택하고, 그가 원하는 각도로, 필름의 종류, 포커스, 필터, 노출타임, 현상 강도, 프린트할 종이, 프린트의 밝기, 프레이밍…. 그러나 그가 개입하지 않는 것은(사진 고유의 특성을 바꾸지 않고서는 개입할 수 없는 것) 나무에서 나오는 빛과 그 빛이 필름에 남기는 흔적 사이이다.
그것이 우리가 그림을 사진과 구별 할 때 쓰는 '흔적'이라는 것으로 의미하는 것일 게다. 그림은 tanslation이다. 그림에서 사과는 둥글에 만들어진다, 그러나 사진에서는 둥글게 주어진다.
making과 receiving 사이이의 그 차이는 시간과의 관계에서의 차이도 암시한다. 그림은 만들어 질 때 시간성을 내포한다. 그리고 그림에서는 예술가가 구성된 요소요소마다 각각 다른 시간을 들인다. 중요한거는 많이 안 중요한 거는 적게.
시간과 관련한 그림과 사진의 이 차이가 그 두가지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사진은 그 자체로 어떤 언어를 가지지 않은 채로 전달이 된다.
사진은 외양을 translate하는 것이 아니고 quote한다.
사진은 그 자체로 언어를 갖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하지 않는다. 사진은 직접적으로 프린트되기 때문에 거짓말 할 수가 없다.
물론 사진이 거짓으로 이용되기도 하는데, 그 거짓은 사진 찍기 이전에 만들어 진 것이고
사진이 진실하기 때문에 그 거짓을 더 진실하게 만든다
사진이 거짓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진은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이 말하는 진실은 한정적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진실에 대한 대중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본 것이 완전한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다양한 층위의 진실을 혼돈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리고 그 혼돈은 현재 대중의 사진 사용에 고질적인 것.
사진은 과학적인 조사에도 사용된다: 의학, 물리, 해부학, 생물학 등. 사진적 정보는 사회 정치적 통제의 시스템에도 사용된다: 사건 서류, 여권. 다른 사진들은 대중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사용된다. 이 세가지 상황은 다르지만 모두 일반적으로 사진의 진실성을 전제로 한다.
사실 사진이 과학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진의 증거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한다: 이것은 조사라는 컨셉츄얼 framework 내에서 정보를 제공한다. 이것은 불충분한 디테일을 전달한다. 사진이 통제 시스템에서 사용되었을 때, 그 증거는 아이덴티티와 존재를 establish하는데 제한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사용될 때는 더 복잡해진다.(경험의 속성이 개입되므로)
엑스레이 사진은 뼈가 부서졌는지 아닌지에 대한 '완전한 진실 utter truth'를 이야기해주지만, 어떻게 하나의 사진이 한 사람의 굶주림의 경험이나 만찬의 경험에 대한 '완전한 진실'을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어떤 면에 있어서는 거부할 수 있는 사진은 없다. 모든 사진은 사실의 상태를 갖고 있다. 고려되어야 할 것은, 어떤 방식으로 사진이 사실에 의미를 줄 수 있는지, 또 줄 수 없는지에 대한 것이다.
사진이 언제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떻게 사용되고 발전행왔는지 상기해보자.
1839년에 사진은 만들어졌고 Auguste Comte가 그의 Cous de Philosophie Positive를 막 마치고 있을 때였다. 실증주의와 카메라 그리고 사회학은 함께 발전했다. 그 모두는 관찰가능한 양적인 사실이 우리에게 자연과 사회에 대한 전체적인 지식을 제공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했다.
그러나 실증주의자들의 유토피아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의 세계는 전문가들(세계의 메커니즘을 마스터했다고 믿는)이 통제하기 더 어렵다 19세기 보다.
성취된 것은 예상치 못한 과학 기술적 발전과 모든 다른 가치들을 세계의 시장(사람, 일, 삶, 죽음 그 모든 것을 상품으로 취급하는)에 종속시킨 것. 성취되지 못한 슬증주의자의 유토피아는 대신 모든 존재하는 것은 정량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후기 자본주의의 지구적 시스템이다-단순히 이것이 통계적 사실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만 아니라 상품화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시스템에서는 경험을 위한 공간은 없다. 각각 사람의 경험은 개인의 문제로 남는다. 세계의 설명으로서의 철한은 개인의 심리로 대치된다.
주관성의 사회적 기능을 위한 공간도 없다. 모든 주관성은 개인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개개 소비자의 꿈의 형태이다.
주관성의 사회적 기능의 이 기본적인 억제 때문에 다른 억제도 뒤따른다: 의미있는 민주주의의 억제(선거와 시장조사로 대체), 사회적 양심(개인의 취향), 역사(인종차별자와 다른 신화), 희망, 그리고 모든 에너지의 가장 주관적이고 사회적인 것들 (평안으로서의 진보의 신성화)
현재 사진이 사용되는 방식은 주관성의 사회적 기능의 억제로부터 나오고 그것을 확실시한다.
사진은 진실을 이야기한다. 이 진실을 즉각적인것으로 축소시키는 이 단순화에서부터 다음을 따른다: 사진이 문에 대해서나 혹은 화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남자가 우는 것이나 혹은 여자의 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진실의 순서에 속해있다.(?)
대중 사진은 실증주의자들의 희망의 자식으로 남았다. 고아로, 그 희망은 지금 죽었기 떄문에, 그 자신은 기업 자본주의의 기회주의에 의해 입양되었다.
사진에 내재하는 불확실성을 거부하는 것은 주관주의의 사회적 기능의 거부와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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