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18 March 2013

우울한 오브제

수잔 손탁, 사진에 관하여, pp. 87-127

초현실주의가 관여한 예술 중에 가장 성공한 것은 사진이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가 사진에 남겨준 유산은 초현실주의가 주로 선보인 환상이나 각종 소도구가 1930년대의 첨단 유행에 급격히 흡수됐듯이 곧 시시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다 해도 초현실주의는 여전히 사진 작업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 세계의 복제물, 그러니까 자연의 시각[눈의 시선]을 통해서 인식할 때보다는 훨씬 제한적이지만 그보다는 훨씬 극적인 현실, 즉 2등급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바로 그 과정에서 말이다. 사진은 조작이 덜 되어 있고 솜씨를 부렸다는 것이 덜 분명해 보일수록, 더 솔직하게 보인다. 게다가 그 권위도 훨씬 더 높아지는 듯하다. p.90

정작 초현실적인 것은 한정된 계급의 지극히 지엽적이고 인종적이며 낡아빠진 취향에 불과했음이 판명됐는데도 말이다. p.91

과학자처럼 행동하는 사진작가도 있고 도덕주의자처럼 행동하는 사진작가도 있다.
과학자는 세계를 분류하고 도덕주의자는 역경에 집중한다.
아우구스 잔더의 1911년 프로젝트, 독일 민족을 사진으로 분류하려던 계획에서도 자의적이다. 잔더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스타일대로 온갖 계급의 사람을 찍었던 것이다. p.101

1935년 농업안정국이 전개했던 작업도 저소득층에게만 관심을 기울렸다. '농촌의 실상과 문제점을 사진으로 기록한다'는 취지로 진행된 이 작업은 뻔뻔스러울 만큼 선전일색이었다.  결국 이 작업의 목적은 사진에 찍힌 사람들의 가치를 선전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사실상 이런 목적이 이 작업의 관점을 규정하게 됐다. 즉, 가난한 사람들이 실제로 가난하다는 점, 가난한 사람들도 고귀하다는 점을 스스로 남득할 필요가 있었던 중간 계급의 관점을.  p.103

미국인들은 흔히 당파성이 강한 사진을 찍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무엇을 존중해야만 하는지 보여주려고 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직시하고 개탄할 필요가 있는지 제시하려고 사진을 찍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역사와 견고한 관계를 맺는다기보다는 역사를 요약한다는 뜻이다. p.104

과거를 소모품으로 바꿔버리는 사진은 일종의 지름길이다. 사진을 수집한다는 것은 초현실주의자처럼 현실을 몽타주하고 역사를 생략해 버린다는 것이다. p.110

물론 사진은 인공물이다. 그렇지만 사진-유물로 가득 찬 이 세계에서는 사진이 발견된 오브제, 즉 무심결에 얻은 이 세계의 단면처럼 보이기 때문에 호소력을 갖는다. 따라서 사진은 예술로서의 권위와 현실이 보여주는 마술을 모두 이용한다. 사진은 한 움큼의 환상이자 한 뭉치의 정보이다. p.112
역사를 헐값에 사들이려 한 이 초현실적 방뻐은 겉으로는 탐욕과 오만함을, 속으로는 우울함을 드러내고 있다. p.112

사진이 가질 수 있는 객관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결국 주관이라는 결론의 글이지만. p.112~118.


잃어버린 과거를 평가하고 현재의 분위기를 기록해 둔다는 이유로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한 순간 역사에 들어가고, 한 순간 사회를 배우며, 한 순간 현실에 개입한다. 그렇지만 이처럼 새롭게 포장된 현실은 일종의 진통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현대 문명을 유리한 위치에서 급진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새롭고 멋진 전략을 약속한 초현실주의자들은 모든 형적을 민주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이 곳곳에 흩어놓은 형적을 역사와 동일시하는 역설에 쉽게 빠져들고 말았다. 초현실주의는 반동적인 얘기만을 들려준다. 역사에서 진기함, 농담, 죽음의 여향 같은 것만을 찾아내는 것이다. p.119

인용(그리고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인용구를 병치하는 것)은 초현실주의적 취향이다. 낡은 세계를 새롭게 만든다는 것, 그것은 새로운 것을 얻으려는 충동에 사로잡힐 때 수집가가 드러내는 가장 깊은 욕망이다. 그렇지만 낡은 세계는 새로워질 수 없다. 적어도 인용 같은 방식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이처럼 애처롭기 짝이 없는 돈 키호테적 면모를 사진도 공유하고 있다. p.120

삶에서는 모든 순간이 중요하거나, 빛을 발하거나, 영원히 고정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진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한다. (현실과는 다르다는 의미)p.126

놀라울 만큼 발빠르게 움직이며 이곳저곳을 모두 기웃거리는 사진은 우리가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으며, 모든 경험을 다 누리고 있는 듯한 거짓되고 기만적인 느낌을 만들어내며 관람객들을 홀리고 있다. p.127





과거를 소모품으로 바꿔버리는 사진은 일종의 지름길이다. 사진을 수집한다는 것은 초현실주의자처럼 현실을 몽타주하고 역사를 생략해 버린다는 것이다. p.110

물론 사진은 인공물이다. 그렇지만 사진-유물로 가득 찬 이 세계에서는 사진이 발견된 오브제, 즉 무심결에 얻은 이 세계의 단면처럼 보이기 때문에 호소력을 갖는다. 따라서 사진은 예술로서의 권위와 현실이 보여주는 마술을 모두 이용한다. 사진은 한 웅큼의 환상이자 한 뭉치의 정보이다. p.111

오늘날 오래된 사진을 새로운 맥락에서 복권시키는 것은 중요한 출판 산업이 됐다. 사진은 일종의 파편에 불과한 것으로서, 세월이 지나면 사진 안에 고정되어 있던 내용도 떨어져 나간다. 사진은 이리저리 떠돌다가 아늑하고도 추상적인 과거가 되어버리기에 다양하게 읽힐 수 있게 된다.(아니면 다른 사진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사진은 일종의 인용구이기도 하기에, 사진을 모아놓은 책은 인용구를 모아놓은 책이나 마찬가지이다. 사진을 책에 담아 발표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사진 자체가 인용구와 대등해진것이다. p.114

사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여겨지기에, 현실을 해석하기 마련인 문학보다 훨씬 더 신뢰할 만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에이지 같은 작가가 쓴 훌륭한 글보다는 녹음기에 기록된 편집됐거나 편집되지 않은 말, 정리됐거나 정리되지 않은 문서, 제 가치를 깎아먹는 감상적이며 편집증적인 일인칭 기록 같이 날것 그대로의 기록을 훨씬 더 신뢰한다. 미국에서는 글로 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증오에 가까울 만큼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젊은이들은 외화의 자막이나 음반 겉면에 씌어진 광고문조차 읽기 싫어한다. 글이 적고 사진이 많은 책을 선호하는 새로운 경향이 생긴 것도 부분적으로는 이 때문이다(물론 사진 자체도 스스로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사진, 즉 솜씨 없이 즉석에서 찍은 거친 사진-이른바'반사진'이 훨씬 더 위세를 떨치고 있다.) p. 118


회화는 의뢰를 받아 제작되거나 구매된다. 그러나 사진은(앨범이나 서랍에서)발견되고, (신문과 잡지에서)오려지며, 쉽사리 찍을 수도 있다. 게다가 오브제로서의 사진은 회화로서는 꿈도 못 꿀 방법으로 대량 생산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면어서는 원래의 아름다움이 파괴되지도 않는다. 사진은 낡거나, 변색되거나, 얼룩지거나, 손상되거나, 빛이 바래도 괜찮아 보이고, 종종 더 좋아 보이기까지 한다. p123

영화의 한 장면을 따오는 것과 책의 한 구절을 따오는 것은 전혀 같지 않다. 어떤 책을 읽는 시간은 독자에게 달려 있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는 시간은 영화 제작자가 결정하고, 영상도 어떻게 편집됐느냐에 따라 빠르거나 느리게 인식될 뿐이다. 따라서 어떤 한 순간을 마음만 내키면 오랫동안 이라도 볼 수 있게 해주는 스틸 사진은 영화와는 상반된 형태를 갖고 있다. 삶이나 사회의 특정한 순간을 정지시켜 놓은 사진이 일련의 과정, 예컨대 시간에 따라 흘러갈 수빢에 없는 삶이나 사회와 상반된 형태를 갖고 있듯이 말이다. 삶에서는 모든 순간이 중요하거나, 빛을 발하거나, 영원히 고정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진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한다. p126


((결국 사진으로 기록해서 보여주는 현실은, 부르주아적 삶의 허울 뒤에 감춰진 현실. 범죄를 탐자하는 탐정처럼 사진작가가 탐지해 놓은 현실.))

((초현실주의자들이 극적인 현실을 만들어냈듯, 사진가이 제시하는 현실도 선택된 자의적 현실이긴 마찬가지->그런데, 그자의성이 일부 소수의 사람의 시각이 아니라 인류 전체라면???))

아래 블로그에 정리 잘 되어 있음:
http://blog.naver.com/iocean74?Redirect=Log&logNo=30023901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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