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18 March 2013

사진의 메시지


롤랑바르트, 김인기편역, <이미지와 글쓰기> 중

보도 사진은 하나의 메시지이다.
메시지의 송신과 수신은 모두 사회학의 영역에 속한다. 인간 집단을 연구하고, 동기, 태도를 정의하며, 이 집단의 행동을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 전체에 연결시키려는 노력.
그러나 메시지 그 자체에 있어서는 방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진은 하나의 대상으로서 구조적인 자율성을 부여받고 있다. 사회학적 분석 그 자체에 선행하며, 사진이라는 이같은 독창적인 구조의 내재적 분석일 수밖에 없는 특수한 방법을 예측해야만 한다.
물론, 순전히 내재적 분석으로 보아도 사진의 구조는 고립된 것이 아니다. 모든 보도 사진은 사진에 동반되는 텍스트와 소통하고 있다. 정보의 총체는 따라서 상이한 두 개의 구조에 의해 지탱된다. 이 두 구조에서 언어구조 하나는 이미 알려져 있고, 또하나는 거의알려지지 않은 사진의 구조다.

사진 메시지의 내용은 무엇인가? 사진은 무엇을 송신하는가? 장면 그 자체, 문자 그대로의 현실이다. 이 대상과 그 이미지 사이에는 중계 즉 코드를 배치하는 일이 전혀 필요없다. 분명히 이미지는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지는 적어도 유사물이며 또한 사진을 정의하는 것은 상식선에서 바로 유사적 완벽함이다. 사진 이미지의 특수한 본질규정이 명백해진다. 그것은 코드없는 메시지이다.
코드(일반적으로 기호가 약속에 의해 그 결합규칙을 이루는 단위와 규칙의 총체)
코드없는 또다른 메시지는 존재하는가? 소묘, 회화, 영화, 연극. 그러나 이 메시지들은 유사적 내용 그 자체(장면, 대상, 풍경) 이외에, 즉각적이며 분명한 방식으로, 보충적인 메시지를 발전시킨다. 시니피앙(기호의 물질적 청각영상)은 제작자의 영향으로 이미지의 어떠한 <처리>이며, 그 시니피에(기호의 비물질적 내용)는 미적이든 이데올로기적이든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사회의 어떠한 <문화>를 가리킨다. 그것은 유사물 그 자체인 외시적미시지(denotation, 외연에 의해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의미를 가리킴)와 어느정도까지는 사회가 생각하는 것을 읽게 해주는 방식인 공시적메시지(connotation, 기회의 1차적 의미가, 2차적 의미의 시니피앙이 되어 그것이 다시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 간단히 말해서, 하나의 단어나 진술이 내포하는 암시적 의미를 가리킴)이다.
그런데 사진은 자신을 현실의 기계적 유사물로 생각하고, 그 첫번째 메시지는 말하자면 그 실체를 가득 채우며, 이차적 메시지가 전개될 여지를 조금도 남겨두지 않는다. 요컨대, 사진은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고갈시키는 외시적 메시지에 의해서만 독점적으로 구성되고 점유되는 유일한 것일 수 있다. 사진 앞에서는 디토네이션의 느낌, 혹은 달리 말해 유사성의 충족이 매우 강해서, 어떤 사진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기술(묘사)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기술은 바로 외시적 메시지에 2차적 메시지를 부가하게 되며, 사진의 유사물에 비해 코노테이션을 불가피하게 구성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1차적 메시지만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일 수 있는데, 코노테이션의 느낌이 너무 강해서(유사성의 충족이 매우 강해서)그것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2차적 메시지를 부가하게된다. 기술은 단지 부정확하다거나 불충분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바꾸는 것, 보여진 것과는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 ))

보도사진은 코노테이션의 요인들인 전문적, 미적, 이데올로기적 기준들에 의거해 작업되고, 선별되고, 구성되고, 제작되고, 처리된 대상물이다. 다른 한편, 이 동일한 사진은 단지 인지되고 수신되는 것이 아니라 읽혀지는 것이다.

사진의 역설은 따라서 하나는 코드없는 메시지(그것은 사진의 유사물일것이다), 다른 하나는 코드를 지닌 메시지(그것은 기술, 혹은 처리, 혹은 글쓰기, 혹은 사진의 수사학일 것이다)라는 두 메시지의 공존이다.

그래서 사진이 객관적인 동시에 충당적이며, 자연적인 동시에 문화적. 외시적 메시지와 공시적 메시지의 중복 양식 때문.

((사진에서 대상과 이미지 사이에는 코드의 개입이 전혀 없지만, 그것의 외적인 코노테이션 작업이 2차적 메시지를 만듦))

사진 속에서 외시적 메시지는 완전히 유사적인 것이므로, 즉 코드에의 의지를 잃었기에, 연구할 여지가 없다. 반대로, 공시적 메시지는 표현의 국면과 내용의 국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해독이 필수적이다.


코노테이션의 방식들
코노테이션은 사진 제작의 여러 다른 층위들(choice, technical treatment, framing, lay-out)에서 완성된다. 엄밀히 말해서 사진의 구조에 속하지 않는 것.

1. Trick effects.
조작한 사진
사진의 외시적인 의미에 직접 개입

2. Pose
문화 속에서 의미를 갖는 특별한 포즈. 두 손을 모으는 등.
초상화에 코노테이션을 이루는 역사적 문법은 따라서 그 재료들을 회화, 연극, 사고의 연상작용, 현재 통용되는 상징체계 등, 정확하게 말해 문화 속에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독자는 사실상 외시되고-공시된 이중구조인 것을 마치 단순한 디노테이션으로 받아들인다.

3. Object
흥미로운 것은 이 피사체(object)들이 사고의 연상을 유도하거나(책=지적인) 혹은 더 애매하게는 진정한 상징이 된다는 것.
따라서 피사체들은 훌륭하게 의미작용을 구성한다: 한 편 오브제는 그 자체로 불연속적이고 완전한, 기호로서의 물리적 특성을 가지고, 다른 한 편 그것들은 분명하고 친숙한 시니피에를 가리킨다. 따라서 오브제는 통사론(syntax, 구문)을 만들 수 있는 진정한 어휘 요소들이다. 피사체는 어쩌면 힘은 없을지라도 의미는 지니고 있다.

4. Photogenia
포토제니 속에서 공시된 메시지는 이미지 그 자체 속에 있으며 조명, 노출 인화에 의해서 미화된다. (space-time을 signify하기 위해 'blurring of movement'나 'flowingness'를 쓰는 것)

5. Aestheticism
회화의 스타일을 따라서 사진찍는 것.(정확한 의미는 잘 모르겠다)

6. Syntax
코노테이션의 시니피앙은 시퀀스의 조각에서가 아니라 연쇄의 층위에서 발견된다.
시퀀스(단지 시퀀스만이) 태도의 반복과 변화에서 비롯되는 희극성을 읽게 해준다.


텍스트와 이미지
우리는 코노테이션의 방식에 보도사진을 동반하는 텍스트를 결합시킬 수 있다. 여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첫째, 문자는 사진에 하나 이상의 디차적 시니피에를 불어넣는 기생적인 메시지를 구성한다. 예전에는 이미지가 텍스트를 도외하면서 텍스트를 명확하게 해주었으나, 오늘날에는 텍스트가 이미지의 의미를 덧붙이고 이미지에 문화, 도덕, 상상력을 덧씌운다. 실제로 흔히, 텍스트는 이미 사진 속에 포함된 코노테이션의 총체를 확대 설명할 따름이다.


사진의 무의미
우리는 코노테이션의 코드가 자연적이지도 인공적이지도 않고 역사적 혹은 문화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의 기호는 특정 사회의 용법에 의해서 어떤 의미들을 부여받은 몸짓, 태도, 표현, 색깔 혹은 효과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관계는 역사적인 것으로 남는다.
코노테이션의 그 코드 덕분에 사진의 해석은 따라서 항상 역사적이다.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사진은 역설적인 형태로, 즉 불활성의 대상을 언어체로 바꾸며 현실 그대로인 가공하지 않은 기계적 예술을 가장 사회적인 제도로 변화시킨다는 역설의 형태로 전개되기 때문에 더 한층 매력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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