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18 March 2013

포토몽타주 Photomontage

Photomontage by Dawn Ades

제1장 머리말

사진의 기술적 조작은 사진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다. 포토그램, 이중 노출, 이중 인화, 합성 사진 등. 그러나 포토몽타주는 이런 것과 다르다.

포토몽타주라는 용어는 1차 대전 직후,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이 사진을 작품에 개입시키는 자신들의 새로운 기법을 설명하기 위해 쓰기시작했다.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은 이 용어를 만장일치로 채택했으나, 후에 누가 그 용어를 처음 쓰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독일어로 몽타주(montage)는 '조립' 또는 '일관 작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에 앞서 입체주의자나 미래주의자들의 콜라주에서 사진을 사용한 예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본질은 소묘나 회화에 속한다.("입체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화가들이 그림에 붙이는 우표와 신문, 성냥갑 등은 그림의 리얼리티 그 자체를 조절하는 도구, 즉 실험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막스 에른스트에게 있어서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에게 콜라주는 시적인 과정이며, 의도가 순수하게 리얼리즘적인 입체주의자들의 콜라주와는 그 목적에 있어서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p.16)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은 레디메이드 이미지를 이용해 포토몽타주를 제작했다. 신문과 잡지에서 오려낸 조각들을 붙이고 글자를 삽입하고 드로잉을 첨가해 무질서하고 폭발적인 이미지, 실재의 자극적인 단편들을 만들어냈다. 여러 요소들 가운데 사진의 활용은 본질적으로 반복될 수 없는, 사적이며 배타적인 유화에 반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반영한다. 포토몽타주는 과학기술의 세계, 대중 매체의 세계, 그리고 사진 메커니즘의 재생산에 속해 있는 것이었다. 한나 회히, "우리의 총체적인 목적은 기계와 산업의 세계로부터 나온 오브제들을 예술의 세계 속에서 종합하는 것이다.". 이는 도상학적 의미뿐만 아니라 포토몽타주의 재료, 특히 신문 사진이나 인쇄 용지 등이 기계적인 과정에 의해 제작된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 (이거는 내 논문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당시 다다이스트들의 반예술적 태도에 관한 것이니까)

비슷한 시기에 러시아 구축주의자들도 사진을 도입, 실험했다. 비록 두 그룹이 작업 조건이 달라서 각기 다른 목적을 위해 사진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사진이 문제 해결의 주요 수단이 되었던 이유는 '리얼리티'와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었다.

아라공은 에세이 '도전하는 회화'(1930)에서 콜라주를 전혀 다른 두 개의 범주로 구분했다. 첫 번째 것은 붙여진 요소가 재현적 특성 때문에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고, 두 번째 것은 재료적 특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아라공의 제안에 따르면, 두 번째 범주의 콜라주는 단지 팔레트를 풍부하게 하는 역할로서만 기능하는 것이다. 반면 첫 번째  범주의 콜라주는 작업 방향을 예시하는데, 이는 "표현된 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보다 더 중요하며, 재현된 오브제는 언어의 기능을 한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만일 사진이 내용상 단순히 보여지는 사실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에 의해 드러나는 사회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포토몽타주이다."

내트킨 (Marcel Natkin)은 '사진의 매혹적인 위조품'(1939)에서 여러 가지 포토몽타주 방법들을 상세히 기술했다. 오려내기, 구성, 수퍼포지션(마스크로 겹치기 포함), 수퍼임프레션, 수퍼포지션과 수퍼임프레션을 결합하기, 음화의 반복적 사용, 이중 인화와 합성 등이 그것이다.



제2장 메시지의 우위

베를린 다다
베를린 다다이스트들 가운데 한편으로는 라울 하우스만과 한나 회히가, 다른 한편으로는 게오르게 그로츠와 존 하트필드가 각각 자신들이 포토몽타주를 창안했다고 주장했다.

1969년 잉골슈타트에서 열린 포토몽타주 전시회의 카탈로그에서는 그로츠와 하트필드가 1919년에 처음으로 사진을 이용해 콜라주를 만든 인물로 언급되었으며, 하트필드가 제작한, 삽화 신문 '모든 사람은 각각의 축구공이다'의 표지가 최초의 포토몽타주로 기록되어 있다.

'포토몽타주'라는 명칭은 1920년 5월 국제 다다 박람회가 있던 기간에 이르러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트필드가 제작한 하우스만, 하트필드, 그리고 그로츠의 초상화들은 카탈로그에서 '다다사진(dadaphotos)'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데 스틸(De Stijl) 작가인 테오 반 두스뷔르흐(Theo van Doesburg)가 발간한, 후기 네오-다다의 평론지 '메카노 Mecano'(붉은색) 1922년호에서는 에른스트의 콜라주 판화를 '사진 메커니즘적 구성(photo-mechanical construction)'이라고 기술했다. '메카노 Mecano'(푸른색)에서는 하우스만의 포토몽타주 작품을 '구성(Construction)'이라고 불렀다.

그로츠와 하우스만은 포토몽타주의 '발견'에 대해 서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포토몽타주가 사진의 통속적이고 코믹한 배열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또한 두 사람 모두 의미의 가능성과 더불어 매체의 파괴적인 잠재력을 이용하고 있다.

존 하트필드
뮌헨의 미술 학교에 환멸을 느끼고, 1916년부터 베를린의 한 영화사에서 일했다. 다다 시기를 거친 후, 독일 공산당 기관지를 위해 일하고 동생과 함게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설립한 말리크 출판사에서 간행되는 책에 실리는 표지와 삽화를 디자인하는 동안, 그는 거의 포토몽타주만을 제작했다. 이후 1933년에 독일에서 추방되었고, 프라하로 이주해서도 일을 계속했으며, 이후 1938년에 런던으로 망명했다. 그는 1968년에 동베를린에서 사망했다.
그는 책과 잡지, 사진 대행사, 신문 등에서 얻은 사진들을 모아 사용하거나 사진가를 고용해서 필요한 사진을 만들어냈으며, 항상 자신의 작품을 포토몽타주라 불렀다. 심지어 전혀 변형하지 않은 사진을 사용하거나 사진 설명을 기초로 해서 특별히 포즈를 취한 사진까지도 그는 포토몽타주라고 여겼다.
포토몽타주가 캐리커처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미술가들이 실제 대상들과 사건들을 오려내어 짜 맞춘다는 점이다. 존 버거(John Berger)는 훌륭한 에세이 '포토몽타주의 정치적 효용  The Political Uses of Photomontage'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포토몽타주의 특별한 이점은, 오려낸 모든 부분들이 사진같이 친근한 외관을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포토몽타주를 볼 때 처음에는 단지 사물들을 응시하게 되지만, 바로 다음 순간에는 그것들이 모두 상징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하트필드의 영향력이 정치적 성향을 가진 포토몽타주 분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확실하다.

선전, 광고, 그리고 구축주의
시각적 선전은 민중의 교육과 정보 제공, 그리고 설득이라는 거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명백히 직접적이고도 성공적인 방식이었고, 한 나라의 구성원이 거의 문맹이거나 한 언어로 통일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 특히 효과적이었다. 포토몽타주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측면의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다다와 구축주의자들 중에 누가 포토몽타주를 먼저 사용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근본적인 핵심은, 베를린 다다이스트들과 러시아 구축주의자들이 낡아빠진 삽화적 또는 구상적 분위기로 전락하지 않고 추상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절박한 필요성에 직면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진은 확실히 현실과의 관계에 있어 특권을 지닌 영역이며, 현실을 재조직하거나 피괴하는 일을 능숙하게 처리할 수도 있다. 이러한 측면이 바로 지배적인 미학 운동으로부터 벗어나 사회적인 관심으로 향하는 추진력을 특징으로 한 러시아와 베를린에서 포토몽타주가 그 모습을 드러낸 이유이다.

'레프' 4호에는 '포토몽타주'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포토몽타주는 우리에게 있어서 사진을 도해적인 수단으로 사용함을 의미한다. 사진의 조합이 그래픽의 구성을 대체한다. 이 대체의 의미는, 사진이 시각적 사실의 스케치가 아니라 엄밀한 고착이라는 것이다. 사진은 이러한 엄밀함과 기록성 때문에 그래픽 이미지가 결코 가질 수 없는, 보는 이에 대한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다.
굶주리는 사람들 사진을 넣어 만든 포스터는 똑같이 굶주리는 사람들을 스케치하여 만든 플래카드보다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만든다.
사진으로 된 상품 광고물은 같은 주제를 그림으로 그린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상품을 선전한다.
......지금까지는 좋은 사진, 즉 예술적 사진은 항상 회화와 드로잉을 모방하려고 노력해 왔는데, 바로 그것이 사진 작품을 약하게 만들고 사진에 내재한 가능성들을 드러내지 못하게 한 이유였다. 사진가들은 사진이 회화처럼 되면 될수록 더 예술적이고 좋아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드러났다. 회화처럼 보일수록 사진은 더 나빠진다. 사진은 몽타주에 사용될 수 있는 고유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그림의 구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이러한 것들(가능성들)이 명백하게 드러나야 한다."

대략 1923년부터 30년대에 이르기까지 포토몽타주의 용도는 상업 출판물과 정치 선전의 영역으로 급속히 확장되어, 포스터와 책 표지, 우편엽서, 잡지, 책의 삽화, 그리고 전시용 설치물에 활용되었다. 포토몽타주는 종종 새로운 인쇄술과 결합하기도 했다. 엘 리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가들은 대부분 몽타주를 제작했다. 몽타주는 사진과 그것에 속한 문구를 한 장에 합친 다음, 인쇄를 위해 사진으로 재생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조작하기 쉽고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기술이 개발되었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이 과정은 자칫 지루하고 판에 박힌 것이 되기 쉽다. 그러나 이 강력한 기술에 의해 포토몽타주는 시각적인 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성공적인 방법으로 판명되었다."

1924년, 로드첸코가 탐정 소설 시리즈용으로 제작한 표준적인 표지 디자인은 서로 다른 사진 이미지들을 끼워 넣을 수 있도록 마련된 것이다. p. 93


제3장 메트로폴리스: 미래의 비전
미래주의 회화가 정열적이고 역동적이기는 했으나, 마리네티가 '미래주의선언'(1909)에서 표명한 현대의 영웅적 시각과 결코 완전히 합치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미래주의적 도시의 비전에 함축된, 스케일의 급격한 변화와 다양한 사물들에 대한 동시적 지각은 포토몽타주의 이상적 주제가 되었다.


제4장 놀라운 것과 평범한 것
사진 이미지의 '실재성'이 정치적 포토몽타주를 특징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한 통상적인 인식을 더욱 성공적으로 깨트려 놀라운 이미지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본질적으로 서로 전혀 다른 요소들의 병치는 환각적인 풍경을 형성한다. 평범한 물건들이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되면, 수수께끼 같은 무엇이 된다. 우리의 사고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좌절하며, 혹은 새로운 사고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다른 실재성들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초현실주의적으로 사용된 포토몽타주의 다양한 예를 보여준다)


제5장 포토몽타주와 비구상 미술
포토몽타주와 비구상 미술의 관계는 명백하지 않은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작용을 하고 있으며 또한 생산적인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포토몽타주들의 구조, 예를 들면 러시아와 폴란드 구축주의자들의 포토몽타주는 자연스럽게 구축주의적, 비구상적 디자인의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



(구축주의: 제1차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러시아에서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등의 여러 분야에 걸쳐 일어난 전위적인 추상미술 운동. 현대 미술상의 반사실주의 운동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예술상의 한 주의로서, 자연의 묘사 또는 인상적인 표현을 배제하고 주로 기계적 또는 기하학적 형태의 합리적, 합목적 구성에 따라 새로운 형식의 미를 창조, 표현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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