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드리야르 인터뷰
장 보드리야르의『시뮬라시옹』
(박) 안녕하세요. "TV 책을 말하다"의 박명진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책은 시뮬라시옹이라는 책입니다. 실제가 아닌 기호와 이미지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의 모습을 아주 명쾌하게 분석하고 있는 그런 책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이 책의 저자 이면서 세계적인 석학이신 장 보드리야르 선생님을 모시겠습니다.
<보드리야르 등장..>
(박) 자 오늘 함께 말씀 나누실 분들 소개드리겠습니다. 먼저 뉴욕대학에서 강의하고 계시고, 미디어 아티스트이신 코디 최 선생님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언제나처럼 우리 프로그램이신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신 김갑수씨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보드리야르 선생님의 시뮬리시옹 이론은요. 사회학 철학 또 영화 광고 예술 다양한 분야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그런 책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는 이 이론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 그리고 이 분야에 대해서 전공하고 계신 분들을 이 자리에 함께 모셨습니다. 모두 동시 통역기를 착용하고 우리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실 것 같습니다.
자 그럼 보드리야르 선생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우리 토론자 선생님들하고 방청객, 그리고 시청자들을 대표해서 제가 좀 기본적인 질문을 몇 가지 드리겠습니다.
우선 먼저 시뮬라시옹 이론이라는 것을 알아듣기 쉽게 아주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장 보드리야르)
쉽게 말해보도록 노력하죠.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는 오래 전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금은 오늘 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생각해봐야 할 시뮬라시옹에 대한 얘기가 되겠죠. 시뮬라시옹의 과정을 보자면, 그 시작은 산업적인 생산입니다. 산업적으로 생산된 물건은 모두 더 이상 특징이 없어진 채 같아집니다. 그 다음 단계는 소비입니다. 산업적으로 생산된 모든 물건은 산업적으로 소비됩니다.
그 때, 유행이나 유통 등등의 모델이 생기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일종의 순종 현상, 즉 모든 것이 모델화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 모델화가 바로 시뮬라시옹의 핵심입니다.
물질적인 단계인 소비 이후, 이 상태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확장되면 커뮤니케이션, 정보화 등을 통해 모든 행동을 인공적으로 예상하는 사회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물론 시뮬라시옹의 사회입니다. 정보화와 더불어 이 세계는 점점 더 비물질적이 되고 미디어 형태를 띠게 됩니다. 미디어의 발달은 시뮬라시옹의 결정적인 단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보다 더 발달된 테크닉, 사이버 등의 가상 현실 국면으로 들어 섰습니다.
완벽한 시뮬라시옹의 시대입니다.
전자 통신 등으로 현실 시간에 개입하기 위해, 시간, 지속성, 역사 등의 실제 현실을 떠나서 가상 현실로 들어서는 시대를 맞았습니다. 현실은 동일한 어쩌면 더 이상적인 모습이 인조 세계로 대체되었습니다. 현실을 완전히 분석한 후 인공적으로 합성해서 현실과 동일하게 보이는 세계로 재생된 세계가 현실 세계를 대체합니다. 여기서 인공적인 모델, 물건, 사고 방식, 행동 등이 등장합니다. 기호도 시뮬라시옹의 핵심입니다.
모든 것이 기호로 변하고, 기호 체계의 모습을 띱니다. 커뮤니케이션 뿐만 아니라, 건축, 정치 등등 모든 것이 현실을 너머 같은 차원에서 같은 모델에 따라 의사 소통되는 세계입니다.
(박) 굉장히 길게 말씀을 하셨는데, 시뮬라시옹이라는 것은 굉장히 여러 단계가 있었군요. 그러고 지금 현재 디지털 문화에 의해서 가능해진 이 시대에는 더 이상 시뮬라시옹이라고도 얘기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거군요. 가상현실 세계에서는.. 하여튼 앞으로 좀더 상세한 말씀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두 번째 드리고 싶은 질문은 좀 간단한 건데요. 20세기 중반 이후에 서구의 대표적인 뭐라고 그럴까요. 사조가 됐던 게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끌어온 대표적인 이론가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근데 그런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동의하십니까? 스스로 포스트 모던 이론가라고 생각하세요?
(장 보드리야르)
저를 포스트모던 이론가라 부릅니다만, 제가 포스트모던이라 불리우는 것이 제 탓 은 아닙니다. 포스트모던이라는 개념은 미국에서 생겨나서 세계화된 개념입니다. 이 용어의 의미가 모호하기 때문에, 제 자신이 포스트모던과 특별히 연결되었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이 용어는 모더니티를 넘어서, 그보다 더 앞 선 것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역사나 산업에 붙이는 이 단어, 포스트의 뜻은, 하나의 한계를 넘었다는 뜻입니다. 사건이 이데올로기, 가치관, 프로그램 등을 따르던 사회를 넘어섰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기술적인 프로그램까지도 모더니티에 속해 있습니다. 불확실하고 변화가 심한 지금의 프로그램은 가상적인 모든 것을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쩌면 포스트모던일 것입니다. 물론 그런 점에서, 시뮬라시옹이 포스트모더니티에 개입됩니다. 시뮬라시옹 차원에서 모든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반면, 현실에는 규칙과 한계가 존재합니다. 뭔가가 그 목적, 그 효용성등으로 정의 되어집니다. 그런데 전자, 정보화된 세계에서는 무한한 변화가 가능해집니다. 아이덴티티 조차도 바꿀 수 있죠.
이것은 사변적인 세계입니다. 이런 것이 포스트모던일 수도 있죠. 그러나 솔직히 이런 용어가 분석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그것은 전설로 넘어간 용어입니다. 프랑스에서는 그 용어를 거의 쓰지 않습니다. 어쨌든 다른 나라들에서 보다 훨씬 덜 씁니다.
(박) 근데 그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많이 얘기했던 시절도 있습니까? 블란서에
서? 오늘날은 별로 얘기 안 한다고 하셨는데..
(장 보드리야르)
이 용어가 프랑스에서는 1980년대에 많이 쓰였습니다. 건축 영역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에 대한 이론을 연구했지요. 그러나 현실이 포스트모던인지 아닌지 묻는다면 아무도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건은 있는 그대로의 사건일 뿐입니다. 이것은 현 상황에 대한 불안, 염려, 고뇌에서 온 말인 것도 같습니다. 이런 상태를 정리할 용어가 필요했겠지요.
(박) 근데 우리 나라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쟁도 많았었구요. 한때는 거의 유행을 이루다시피 했었잖아요. 근데 요즘은 우리 나라도 별로 그거에 대해서 얘기 안하고 있는 것 같아요. 김갑수씨 그건 왜 그렇게 됐다고 보세요?
(김) 한국 현실을 말하라는 거니까 감히 제가 공부하러 나왔지만 말씀을 드리겠는데, 일단 90년대 초반의 포스트모더니즘 유행을 말하려면 그 이전 상황을 봐야 합니다. 80년대 이때에는 지식 사회나 대학 사회가 전부다 변증법과 맑시즘이었습니다. 서구 사회는 이미 오래 전에 용도 폐기되다시피 했지만 우리한테는 그때 비로소 이념의 금제가 풀리고 군부 독재가 몰락하던 시기였죠. 그래서 사회 변혁을 위한 이론적 모델이 필요했고, 맑시즘과 변증법이 딱 맞았던 겁니다. 근데 우리 잘 아는 90년대 접어들면서 동구권이라든지 현실 사회주의가 사라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래도 제도적으로 완전히 민주주의를 얻게 되고 이 앞에서 우리는 완전히 낯선 세상을 맞이한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었어요. 우리가 맞았던 90년대라는 건 나중에 카오스의 시대다 이렇게 표현하게 되는데 이 때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떤 언어가 없었어요. 그럴 때 최초로 충격적으로 왔던 존재가 제 기억에는 미셸 푸코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이 푸코라는 사람은 근대 기반을 이룬 이성, 합리적 이상을 감옥이자 병동으로 비판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사회에서 근대라는 건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조국 근대화 이런 것처럼 우리가 추구해야될 가치였거든요.
근데 그 근대가 굉장히 나쁜 것이다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다. 이런 이론으로 설명이 들어오자 이건 굉장히 새롭고 신선했습니다. 이후에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나 문예쪽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크 데리다의 탈구축이 정확한 말인데, 해체라는 말을 많이 쓰면서 많은 것을 받아들였고 또 그 이후에는 불교의 선 사상과 딜뢰즈의 사상이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하면서 또 유행 현상을 이뤘구요. 그리고 앞에 계신 보드리야르 선생님이 상품 소비 사회의 이미지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 또 하나는 그 후에 이야기지만 정보 사회에 진입하면서 사이버 시대를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이론적 모형으로 보드리야르 선생님 그리고 또 한분이 부르디에 문화권력론 등등이었습니다. 뭐 더 많은 분들이 있겠지만 우리 사회의 유행 현상을 이뤘던 분들입니다. 근데 이것이 어떻게 전개됐냐면 재미있는 것은 역시 유행 은 유행이었습니다. 표피적인 유행은 뭐였냐면 옛날 아방가르드가 그랬던 것처럼 신기하고 이상하고 허망하고 괴상한 것은 전부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르는 실의적인 게 있었습니다. 아무 것에서나 포스트 모던 포스트 모던 이렇게 돼서 좀 허망하게 흘러갔는데, 좌파진영에서 좀 포스트모더니즘을 심하게 공박하고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은 근대도 오지 않았는데 무슨 탈근대냐.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근대도 오지않은 상황에서 탈근대, 근대를 넘어선 사회를 말한다는 게 웃긴 거 아니냐. 이런 비판을 한 측에서 하기 시작했구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시 우리 사회는 프랑스는 잘 모르겠습니다. 근대 한국은 변혁을 위한 이론을 상당히 갈망합니다. 변혁 에너지, 근데 지금 우리가 포스트모던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 철학 사조로 이야기하면 포스트 구조주의가 더 맞는 적합한 용어일텐데, 이 포스트 모던 내지 포스트 구조 주의에서는 현실 변혁을 위한 에너지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현실에 대한 설명력은 있었으나 변혁 에너지를 찾기는 어려워서 많은 사람들이 점점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면서 결론적으로는 소수의 문예 이론가들이 쓰는 전문 용어화되고 있는 게 현재 상황이다 이렇습니다.
(박) 근데 보드리야르 선생님께 한가지 또 여쭤보겠는데요. 시뮬라시옹 이론이라는 것은 80년대 만들어진 거 아닙니까. 근데 80년대에도 이야기가 됐지만 지금 오늘날 와서 아마 영미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21세기 들어와서 더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근데 그게 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장 보드리야르)
한국에서 왜 그런지에 저로서는 잘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시뮬라시옹과 80년대는 함께 합니다. 그 이후 시뮬라시옹은 거의 풍속, 문화가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것은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로 쓰이는 말이 아닙니다. 이른 바 선진국, 한국 같은 나라의 위기를 겪지 못한 나라들에서는 그렇습니다. 저개발국은, 소비와 재화가 풍부해짐에 따라 시뮬라시옹 문제를 모던 사회의 문제 와 함께 겪게 되지요.
위기 이후, 성장, 급성장을 겪은 후, 한국에서는 시뮬라시옹 문제가 격렬히 제기되었습니다.
생산되어 물량이 충분한 집적 상태, 그 문턱을 넘어서야만 사물은 특징을 잃은 채, 기호로 변환됩니다. 포스트모더니티는 권력, 지식, 역사 등 모든 것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 때, 일종의 상실, 권력 지식 등의 정의가 상실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푸코도 그 런 이야기를 했죠. 그 때 인위적으로 사물이 기호의 형태로 만들어집니다. 현실적인 형태를 잃은 사물을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기호를 찾는 것입니다. 정권이나 지식 등의 차원에서 이런 양상이 나타나고, 그 변화 과정은 각기 다릅니다. 모든 나라가 시뮬라시옹을 겪을 것입니다. 이것이 꼭 발전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생산과 소비, 정보 등의 과잉에 따라 시뮬라시옹을 겪게 될 것 입니다.
(박) 그런데 아까 말씀하시는 중에 대상을 잃어버리면서 결국은 이미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걸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주시면 어떨까요?
(장 보드리야르)
전통적인 세계에서는 예식이나 영상 주제 같은 것이 있기는 했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기술적인 이미지는 없었죠. 특히 미디어 이미지와 함께 사물 세계는 이미지 세계로 대체됩니다. 언어가 이미 있었지만, 언어도 인공물, 시뮬라크르입니다. 하지만 언어에는 지시체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미지는 현실에서 훨씬 더 자유롭습니다. 지시체, 의미를 상관하지 않고 재 현할 수 있죠. 행동이나 언어보다 이미지는 훨씬 쉽게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습 니다. 시각화, 거의 모든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은 돌연변이입니다. 이미지의 육감적인 세계가 미디어의 세계로 옮겨갑니다. 맥루한이 말한 것처럼, 지시체나 의미작용이 필요 없는, 이미지가 홀로 기능하는 순 수 미디어의 세계로 접어듭니다.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계, SF 이미지, ET처럼 독립 공간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이미지는 감각적인 현실이라는 생각도 해야 합니다. 이미지가 시뮬라시옹의 완벽한 대상은 아닙니다. 말이나 이미지나 모든 것이 시뮬라시옹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시뮬라크르 차원이 아닌 이미지도 있습니다. 내용이 알찬 상징적인 가치가 있는 그런 이미지 말입니다. 바로 여기서 예술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가시성이 범람하는 가운데 미학적 예술적 상징적인 고유성을 갖는 이미지가 가능할까?.
텔레비전 화면에서 이런 이미지를 찾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고, 또 미디어의 힘을 비틀어서, 메시지를 띠는 이미지를 찾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박) 시뮬라크르가 아닌 이미지의 세계가 있다 그 말씀 하셨는데, 이따가 코디 최선생님께서 그 부분을 조금 더 나중에 설명해주세요.
(박) 보드리야르 선생님의 시뮬라시옹 이론을 풀어보자면 이렇게도 얘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대 사회는 이미 실제가 아닌 기호 이미지들로 가득차 있고 그래서 실제와 기호 혹은 이미지 사이에 구분도 불가능한 그런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이 현실적인 체험을 통해서보다는 이미지나 혹은 기호의 세계를 통해서 이해하게되는 비중이라고 그럴 까요. 훨씬 더 높아지고 있다는 그런 얘기인 것 같아요. 그래서 자 그럼 세상이라 는 게 그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과연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함께 보시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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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네. 코디 최 선생님은 뉴욕에서 활동하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많은 예를 들으실 수 있으실 것 같은데, 시뮬라시옹 이론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기호나 이미지가 실제를 침범해서 결국은 실제보다 더 우리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그렇게 느끼시는 예들이랄까요. 그런 것좀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최) 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굉장히 여러 가지 실례가 있겠지만 한 세가지 정도만 실례를 들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예는 미국에 서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요. 1980년대 경에 미국에서 스포츠 웨어 스포츠 상품들을 강하게 선전하기 위해서 슬로건 애드버타이징을 많이 아주 만들었죠. 주로 슬로건 애드버타이징을 통해서..
(박) 슬로건 애드버타이징이라고 하면 뭘 얘기하죠?
(최) 이미지 메이킹이죠. 쉽게 얘기하면 나이키 운동화에 무슨 조던.. 마이클 조던이라는 이름을 넣어서 마이클 조던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켜서 나이키 운동화가 어떤 전혀 근거없는 새로운 아이디어 상품 내지는 어떤 인기 상품으로 변모되는 현상이죠. 실질적으로 1985년에 디트로이트에서 있었던 사건인데, 숀 존슨이라는 사람이 필라 운동화를 훔치기 위해서 13방의 총을 쏜, 난사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또 실질적으로 이미지에 자기 스스로 매료돼서 1989년과 90년에는 각각 디트로이트와 필라델피아에서 나이키 운동화 때문에 두 명의 젊은 학생이 살해를 당하는 사건들 이 벌어지죠. 이런 것들이 하나 어떤 근거없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어떤 새로운 이미지에서 지배받는 정신을 지배받는 그런 한 실례가 될 수 있겠구요. 두 번째로는 우리 나라 현상을 한번 제가 들어보자면, 아주 급격히 유행하고 있는 성형수술을 제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상징적이고 허구적인 미의 기준이 여성들의 머릿속에 유토피아적인 욕망으로 아주 각인이 되어버리는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죠. 그래서 곧바로 이것이 성형수술로 이어지는 현상까지 만들어지는 거죠. 여기에서 이 자체의 움직임도 바로 이 근거없는 욕망이나 이미지에서 지배받는 현상이 되겠고, 동시에 이 허구적인 미의 척도인 날씬 한 몸매, 커다란 눈, 오똑한 코, 작은 얼굴 이와 같은 것들을 시뮬라시옹 현상에서의 어떤 일정한 코드나 사인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국제적으로 일어난 현상들을 하나 예를 들자면요. 글로벌적으 로 국제적으로 일어난 현상을 들면 쉽게 얘기해서 인터넷이나 웹 사이트도 역시 그 예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소위 일종의 버츄얼 리얼리티라고 불리는 사이버 소사이티가 바로 거대한 시뮬라시옹의 집단이라고 간주를 할 수 있는 거죠. 다시 얘기해서 여기에는 1차원적인 것과 2차원적인 두가지 시뮬라이시옹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볼 수 있는데, 우선 첫 번째 것은, 1차원적인 것은 온라인 네트워킹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온라인 선상에는 아무런 물건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실제로 물건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는 거죠. 그 예를 들어서 온라인에서 물건을 사는 행위라든지 사이버 섹스라든지 아무런 그 외에도 이메일 같은 것도 역시 거기에 속하게 되겠죠. 또 이 내용 안에서 2차원적인 내용은 뭐냐면 바로 이 안에 이 인터넷이나 웹 사이트 선상 안에서는 원본과 복사본의 구분이 전혀 없이 아주 다량으로 생산이 된다는 얘깁니다.
이것이 바로 사이버 소사이티인데, 그 이유는 사이버 소사이티로 바로 제로, 0과 1 이라는 정보로 구성되어있는 디지털의 산물, 즉 코드라는 그것에 의해서 자가 발생적으로 만들어지는 그 현상도 있기 때문에 결국은 그 자체의 흐름도 시뮬라시옹에서 벌어지는 어떤 하나의 현상과 깊게 관련이 있다고 보여지는 거죠. 그래서 역시 1차원적인 것과 2차원적인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저는 느껴지고 있습니다.
(박) 그러니까 굉장히 예를 들기로 말하자면 무수하게 많겠군요. 그쵸? 거의 우리 환경을 이루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말씀을 들어보니까.. 자 그런데 이런 아까도 대석학 앞에서 한국에 관한 얘기를 하기가 참 거북하다고 하셨는데, 근데 말씀하셔야돼요. 보드리야르 선생의 시뮬라시옹 이론에 공감하십니까? 김갑수 선생님? 어떻게 보세요?
(김) 누구나 느끼겠지만 읽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그런 거예요. 그러나 커다란 맥락은 저희가 하나의 지식으로 알 수가 있고 읽으면 보드리야르 선생의 책의 특징은 바로 이 이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의 현장에서 어떤 것이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나 이걸 생각하게 만듭니다. 저도 코디 최씨가 예를들었듯이 가까운데서 있는 두 가지 예를 들어 볼 수가 있는데요. 하나는 젊은 작가 들의 소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 자연이 묘사되어있는 걸 보면 결코 그게 체험적 자연이 아닙니다. 무슨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에 있는 대평원이 펼쳐 진다든지 이런 식으로 그 영화에서, 영화도 사실은 자연을 취사선택해서 만든 것인데, 그걸 본 이미지를 갖고 자기 나름대로 또 한번의 가공을 거쳤는데, 그렇게 소설로 묘사되어있는 자연 현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것 같
은 실제 자연인데, 그 작품이 설득력이 있을 때는 상당히 그럴싸한 모습이 됩니다.
하나 또 예를 들어볼 수 있는 게, 텔레비전 드라마입니다. 통속한 연속극을 보면 대가족이 모여 살아서 결혼 문제 때문에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대상이 되는 딸이 어 쩌구 저쩌구 매일 밥도 먹고 이런 모습이 나오는데, 실제로 그런 가정은 없습니다. 또는 야심에 찬 젊은이가 갑자기 성공해서 재벌 기업을 이루고 이런 모습이 나오는 데 다시 말해서 텔레비전 드라마에 묘사되어있는 삶의 모습은 그게 진짜 삶 같지만 실은 텔레비전에서 만든 거예요.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간혹 가정 생활이라든지 기업활동이라든지 규범을 거기에서 찾는단 말이에요. 드라마가 주는 영향력에 지배를 받는데, 실은 실제 그러한 것, 우리가 체험 속에서 보자면 너무나 그것은 가공의 것이죠. 조금씩 달라져있는.. 그러니까 지금 말씀하시는 시뮬라시옹 이론에 근거가 되는 우리 삶의 현실은 너무나 다차원적으로 폭넓게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박) 그런데 저기 시뮬라시옹 이론에 의하면 결국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의 환경이 되다시피하고 있는 이미지 혹은 기호의 세계라는 것이 그 현실과 밀착이 되어 있지 않다는 거 아닙니까? 현실에서 유리된 세계라는 얘기 아니에요? 그렇게 될 때 이런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어요. 보드리야르 선생님.. 결국 우리가 현실로부터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갖고 오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이런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거든요. 사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여러 가지 갈등 또 해결해야 되는 문제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지의 지배를 받으면서 현실로부터 유리되게 된다면 결국 그 현실의 문제들이라는 것은 우리가 즉각적으로 해결해야 되는 문제들이라는 것은 해결의 방법이 없는가. 해결의 전망을 못 갖게 되는 거 아닌가 하는 그런 이유로 비판을 받고 있는 점도 있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장 보드리야르)
답은 없습니다.
현실과 시뮬라시옹을 언어 자체로만 대립시킨다면, 이 두 용어는 완전히 모순되는 것입니다.
시뮬라시옹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입니다. 현실보다 더 효력을 높인 현실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유전적인 조작을 통해 더 나은 유토피아와 인류를 만들고자 하는 것, 그것은 시뮬라시옹입니다. 테크놀로지와 과학을 위해서 이렇게 되겠죠. 지금의 인간보다 더 현실적인 인간 말입니다. 초기 텔레비전에는 외부에서 포착할 수 있는 주제와 이미지를 보는 관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빅 브라더나 리얼리티 쇼 같은 프로를 보면, 관객인 우리가 이미지에 들어 가서 우리 자신이 이미지가 되고 우리의 삶을 이미지 상태로 즉각적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은 현실에서 삶을 살 시간조차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현실 시간에서 직접 이미지로 살게 되는 것, 그것은 순전한 시뮬라시옹입니다. 이미지가 완전히 사라지고 현실의 자리를 이미지가 완전히 차지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다가가서 더 이상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텔레비전적인 삶을 연기합니다. 이미지를 통해 대리로 자신들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는 정말 급진적인 변화입니다. 그래서 중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 인류는 아직도 성과 몸과 현실적인 실체를 가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행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인간과 현실은 실종 가도에 있습니다. 시뮬라시옹과 현실의 거리를 아직은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지, 미디어, 정보, 디지털에 잠긴 우리는 지시 대상으로써의 현실을 완전히 잃게 될 것입니다. 현실에 대해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세대가 나타날 것입니다.
새로운 식물이나 종처럼, 유전학적으로 조작되어 컴퓨터화 되어서, 현실이나 역사를 겪지 못한 새로운 인류의 종이 하이퍼리얼 유사성 세계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박) 지금 그 시대가 이미 시작됐다는 말씀이죠? 현실이 완전히 사라지는 그 시대 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장 보드리야르)
우리는 벌써 그런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 세계가 단번에 같은 발달 단계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의 모델화, 그것이 세계화입니다. 모두 돌이킬 수 없이 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저항도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아직 세계화가 완전히 우세한 것만은 아닙니다. 모더니티 단계를 완전히 경험하지 않은 나라들도 있는 데 반해서, 이 문제는 모두 가 겪을 수밖에 없는 시험입니다. 그런데 세계화의 자업자득으로서, 응전으로서의 역전이가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미 오늘날 하이퍼리얼리티, 가상성에 대한 저항이 읽힙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인류학적으로 언어적으로 읽힙니다. 우리가 맞고 있는 상황은 유동적입니다. 세계화는 자체적인 시스템 논리 때문에 극단으로 치달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힘이 발달하기 때문에 반대의 대립하는 힘도 생겨납니다. 그 때 갈등이 생깁니다. 갈등은 이미 존재합니다.
(박) 그런데 아까 하이퍼리얼한 현상에 대해서 저항의 움직임이 각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과연 그럼 그런 저항이라는 게 바람직한 거라고 볼 수 있습니까? 아니면 부정적인 걸로 봐야됩니까?
(장 보드리야르)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격하고 반동적이어서 심지어 테러리즘에 가까울지라도 그렇습니다. 시뮬라시옹의 분석을 통해 저는 모더니티 세계, 가치 체계, 변증법적인 사고에 대해 비판을 해왔습니다. 시뮬라시옹 체계를 현실의 파멸 체계로 묘사하면서 그것이 거의 재난의 차원이라는 것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급격한 변화가 진행됨에 따라, 이제는 이론적인 분석으로는 충분하지 않게 되었고 분석보다 강한 거부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반 세계화 운동은, 본능적이고 더 깊은 강한 움직임입니다. 완전히 추상화된 삶을 거부하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너무나 비현실적이 되어 버린 현실 때문에, 몸이 변화되고 성이 파괴됩니다 완전한 가상성, 이를테면 사이버 성에 이르려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 세계의 섹슈얼리티는 사라져야 합니다. 자연적인 영역으로서의 성과 몸, 삶과 죽음은 무력화될 것이며 가상성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변모보다 더한 돌연변이로, 인간이라는 종의 문제입니다.
(박) 근데 그런 변화에 대해서 우리가 저항을 해야됩니까? 우리가 순응하고 따라가 야 되는 겁니까?
(장 보드리야르)
저항해야 합니다.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세계화는, 지금까지 보여준 결과를 보면, 수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뒤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전통적인 인간주의, 변증법적 역사, 전통적인 가치로 되돌아 갈 수는 없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세계화를 통해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지만 게임을 하던지, 즉 물러서지 말고 게임에 참여하던지, 하지만 게임 규칙을 전복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정면 대응보다는 역행 전략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어떻게 세계화에 대항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테크닉에 테크닉으로 저항할 수 있을까요? 테크닉은 모든 것을 통합합니다. 가상 세계는 부정성, 대립을 모릅니다. 가상적으로 모든 것을 통합합니다. 효율적으로 세계화를 저지하려면, 이중의 전략이 필요합니다. 게임에 개입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끊임없이 이것이 수용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져야합니다.
(박) 근데 아까 말씀 중에 우리가 거의 완벽한 현실의 상실 국면으로 지금 접어 들어가고 있다고 얘기를 하셨거든요. 근데 그 저항이라는 것은 그 현실을 되찾기 위한 저항이어야지 되는 겁니까?
(장 보드리야르)
현실이 끝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모던한 사회에는 항상 궁극적인 목적, 유토피아가 있었고, 성장과 부를 통해 그것을 추구했습니다. 발달이 무한히 계속된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현실의 한계선, 발달의 가능성이 소진된 지점에 와있습니다. 거의 끝을 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계에서 규칙은 더 이상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성, 객관성, 과학성 같은 규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과학조차 진실과 객관성을 넘어서 있습니다.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게임은 유동적입니다. 현실의 상실이 현실이 끝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전에 현실성의 정의는, 이성적으로 파악되는 특징을 가진 것을 재생산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은 이성적인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재생산이 불가능합니다. 이 세계는 연속적인 움직임 속에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아이덴티티 조차 유동적입니다. 개인, 민족 등이 아이덴티티의 문제를 갖게 됩니다. 하나의 세계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개성과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국인들을 포함해서 모두가 이런 문제에 당면하고 있습니다.
이 기술적, 가상적 진보 과정의 끝에 이르러 아이덴티티의 고유성을 추구하게 되는 참담한 문제 말입니다.
(박) 네. 자 그럼 토론을 좀 들어보셨는데, 방청객 여러분들, 여기 와 계신 분들 궁금하신 거 많으실 것 같고, 질문도 있으실 것 같은데, 보드리야르 선생님께 누가 질문하시겠습니까? 어떤 분 시작하시겠어요? 아 네..
(방청객1) 선생님께서는 이미지의 지배가 무한히 계속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람의 경우는 무한히 계속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장 보드리야르)
이미지의 지배라고 말한 것은 이미지에 우리가 잠겨 있다는 뜻입니다. 이미지가 단지 지배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공모자가 됩니다. 우리는 인질이고 희생자이며 공범이고 배우입니다. 매우 복잡하죠.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감각적인 이미지도 아닌 세계 즉, 숫자와 디지털, 완전히 비물질적인 세계, 디지털 가상 세계에 놓여 있습니다. 맥루한이 텔레비전이 촉각적이라 한 얘기는 만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추상적인 이미지를 보기만 해도 그 형체가 만진 것처럼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보기만 해도 즉시 실제처럼 경험되는 이미지가 마치 접촉시 바이러스같이 즉시 감염된다는 것입니다. 사물에서 이미지, 즉 사물에서 기호로 나아갔던 기호의 발달상은, 오늘날 다시 이미지와 기호가 다른 사물로 넘어가는 것을 예측 가능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실제적인 사물이 아닌 가상의 사물입니다. 새로운 우상화, 완전히 인위적인 인공물을 우상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조작이 가능해질 것이고, 우상이 된 오브제는 성과 사랑을 대치하게 될 것입
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대체된 세계, 즉 이미지 자체가 사물이 된 세계에서는 시선의 거리가 없어집니다. 저는 이미지를 좋아합니다. 이미지는 스펙터클이고 시선이 있으며 이미지를 보고 판단하는 즐거움을 줍니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완전한 조작 상태에서 사라질 위 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미학적인 시선의 거리도 사라집니다. 이미지가 헤게모니를 잡은 이후, 이미지는 대상의 세계에 용해된 이미지의 페티시즘 형태로 진행될 것입니다.
(박) 자 그럼 그 다음 분 누구 또 질문있으세요? 네.
(방청객2) 그 시뮬라시옹 이론이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럼 장 보드리야르 선생님은 이 시뮬라시옹 이론을 창조하시면서 어디에서 영향을 받으셔서 이런 이론을 만들어내셨는지 궁금하거든요.
(장 보드리야르)
철학에서는 시뮬라크르 이론이 이미 플라톤 이래로 논의되어 왔습니다.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맥루한에게 받았습니다. 그의 분석, 미디어가 메시지가 되는 공식이, 제 이론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그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았습니다. 맥루한과 저의 연구는 매우 근접한다고 하겠습니다. 롤랑 바르트에게서도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직관이 있습니다. 그는 시뮬라시옹, 거리, 세계와 그 재현, 사물과 그 복제물의 게임, 게임의 가능성, 텍스트, 언어와의 게임 등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시뮬라시옹은 게임입니다. 텍스트는 물론 예술에서도 흥미롭게 볼 수 있는 훌륭한 기술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고차원의 예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쪽, 일종의 정신적 에너지의 타락한 형태도 있죠.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다른 이들의 이론이 아닌, 현 상황, 우리 시대의 관심사만 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박) 자 그럼 또 다른 분 누구 질문 있으십니까? 네.
(방청객3) 시각 예술과 이미지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온갖 이미지가 난무하는 세계에서 예술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창조적 상상력, 즉 예술이 이런 이미지가 범람하는 현상에 저항의 수단이 될 수 있을까요?
(장 보드리야르)
모더니즘의 예술은 거의 언제나 저항, 비판, 혁명적 심지어 테러리스트의 차원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예술의 정의는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현대 예술이 모든 기술, 첨단 테크놀로지를 동원하면서도, 같은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반복이 아닌 본질적인 예술의 차원 그 거리를 유지하면서, 단지 기술만 활용한 채 통합적인 기술, 그 미디어의 가능성의 극에 이르기까지 게임을 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예술이 첨단 테크놀로지를 활용해서 현실을 쓰는 것, 그 뿐이라면 예술에는 저항이나 대안이 없는 셈입니다. 대안이 있는가? 예술 쪽에 있는가? 예전에는 분명 예술이 그랬었지만, 오늘의 예술은 더 이상 대안을 제안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판단은 결정적이지는 않습니다.
또한 예술에만 국한된 것도 아닙니다. 철학, 정치 등을 비롯한 모든 영역은, 기능, 자동성, 가상성 등에 의해 통합되고 침해당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가상성에 대항해서 가상성이라는 방법으로 싸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저 가상성에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술 전반에 걸친 판단이지, 예술가에 대한 비판은 아닙니다. 구별을 잘 해야 합니다. 현대 예술에 대한 저의 판단은 부정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습니다. 현대 예술의 발전상을 보면, 점점 가상적인 현실에 동화되고 시뮬라시옹되는 양상을 보게 됩니다. 예술이 진부한 일상을 되풀이하는 것일 뿐이라면, 그에 준하는 이미지만이라면 차별화되거나 고유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대립이나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창작할 때 예술가들은 고유성의 순간을 삽니다. 그들의 예술이 공유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누구나 컴퓨터 앞에서 예술가가 될 수 있습니다. 모두 가상적인 현실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모두가 자신의 가상 현실을 창조하면, 타인의 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공유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지만 어느 누구도 타인의 세계에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타성과 커뮤니케이션의 끝입니다. 모두가 예술가이므로 이는 예술의 이상적인 결말인 동시에, 누군가는 창조하고 누군가는 거리를 두고 보는 집단적인 마술, 그 영향력은 사라지게 되기에 예술이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술의 또 다른 문제는, 예술 기관, 미학, 미술관이 독점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창조의 고유한 순간이 더 이상 포착되어 전달하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예술의 내적인 변이가 필요합니다. 테크닉의 모든 가능성을 흡수하고도, 미디어화된 일상의 진부함과는 다르고 대립된 역할로 남기 위해서 말입니다.
(박) 실제가 없는 기호나 이미지가 우리를 지배한다. 혹은 아까 보드리야르 선생님 표현대로 이야기한다면 잠겨서 살게 된다 그런 이야기도 했거든요. 근데 궁금한 것 은 그런 현상이 왜 일어난다고 생각하십니까? 보드리야르 선생님께 우선 먼저 질문 을 드리구요. 시뮬라시옹 현상 자체가 왜 발생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왜 생겼다고 생각하시는지..
(장 보드리야르)
원인을 찾을 수 있다면 저항도 할 수 있겠죠. 원인이 아니라 차원이 문제입니다. 수천년 동안 지속되어 발달된 테크닉과 더불어 우리는 물질적인 상태에서 빗물 질 상태, 즉 이미지로 옮겨왔습니다.
(박) 잠깐만 질문을 드리겠는데요. 그런 기술이 물질성으로부터 비물질성으로 변하게 되는 시기라는 게 대충 어느 때일까요?
(장 보드리야르)
논의 중인 시뮬라시옹의 모체로서의 초기 광고, 영화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현실의 삶을 마술적인 이미지로 재현해서 보편화시켰습니다. 또 19세기 사진이 있었고, 영화, 광고 등이 있었지만, 그것은 아직 산업적인 생산물 이 아니었습니다. 두 가지 구성 요소를 구별해야 합니다. 이미지를 일반화시키는 것과 이미지를 증식시키는 테크닉의 가능성을 구별해야 합니다. 벤야민이 사진에 대해, 기술적인 복제를 통해 예술적인 오브제를 떠나 기술적인 이 미지에 이른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질문이 생깁니다. 인류로 하여금 이미지에 그토록 집착을 갖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뮬라시옹은 매혹적인 것이며 모두가 이 매혹에 참여합니다 근본적인 원인이, 인간이 무의식적 욕망 속에서 즉 이미지로 변하려는 데 있는지도 모르지요. 자신의 몸을 벗어나 자신의 전부를 이미지로 투영하고 이미지 위에서 운명을 연출 하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먼저 자신의 이미지 위에서 그리고 그와 동일한 복제 인간을 통해서 말입니다. 클론의 생산은, 다른 세계 그러나 우리 것과 동일한 그 세계를 복제해서 거기서 죽 음을 몰아 내고, 클론을 무한히 만들어 생을 지속하려는 의도와 같은 것입니다. 그 뒤에 변태적인 전인류의 욕망이 있는가? 기술성의 진보가 그러한 현혹의 욕망을 만드는가? 아니면 그 욕망이 필요한 기술을 발달하게 하는가? 이는 해결할 수 없는 순환적인 문제입니다. 원인과 그 적용이라는 관점으로 욕망과 테크놀로지의 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박) 지금 보드리야르 선생님께서 이미지에 대한 매혹이라는 게 결국 무의식적인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육체적인 존재로써의 한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그런 열망이 이미지에 대한 매혹을 불러일으키고 그게 시뮬라시옹 현상을 확대시켜나간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코디 최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최) 저 역시도 그 의견에 아주 100% 동감하구요. 또 비슷한 얘기가 되긴 하겠지만 거기에 한가지를 더 연결을 시킨다면 기계 혁명 이후에 모더니즘의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막연하게 이제는 불가능한 것이 가능할 수 있다라는 막연한 희망같지 않은 희망이 생겼다고 볼 수 있죠. 그러면서 그런 흐름이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와 함께 같이 동시대적 끝없이 발전하게 되는 과정이 생깁니다. 결국에 자본주의가 극으로 달하면서 인간의 욕망도 극으로 달했고 그러다 보니까 지금 어쩔 수 없이 장 보드리야르 선생님이 얘기하신 것 같은 그러한 욕망의 한계를 초월하는 현 상들이 벌어졌고 당연히 그 모습은 자기의 한계를 초월하기 때문에 유토피아적이거 나 아니면 그것이 어떤 기호학적인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지 않았나 그런 의견을 함께 갖고 있습니다.
(박) 네. 그런데 ..
(최) 거기에 자본주의가 큰 일을 했다고 보는 거죠.
(박) 근데, 이제 문제는요.. 자 우리가 보드리야르 선생께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미지 속에 이미지 지배를 받는다. 혹은 이미지 속에 파묻혀서 잠겨서 살게 된다 지금 현재 사회가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가 느끼는 궁금증은 뭐냐면요, 자 그렇다 치자. 그럼 뭐가 문제냐. 그게 왜 문제가 되는 거냐. 그런 질문이 있을 수 있거든요. 보드리야르 선생께서는 어떻게 답변해주시겠습니까?
(장 보드리야르)
이미지 조작은 우리가 잃어 가는 현실 세계에 대한 무책임을 낳습니다. 현실을 현실 속에서 변화시키는 대신 다만 이미지로 변화시킬 뿐이기 때문입니다.
(박) 현실이 필요로 하는 변혁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말씀이시죠. 그런데 이 시뮬라시옹의 책에 보면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상, 혹은 이미지 속에 파묻혀 있게 되는 이러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위대하다. 굉장히 지금 미디어의 전성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미디어를 단죄하는 것 같은 그런 인상을 많이 받게 됩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장 보드리야르)
네, 저는 미디어의 역할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윤리나 정치적 가치 차원에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디어의 파워가 단 번에 우리의 전통적인 가치 체계를 비롯한 여러 상황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급작스런 단절을 불러일으킨 미디어의 힘을 비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평가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저는 또 미디어를 분석하고 미디어를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미디어를 두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미디어를 비판하는 것 뿐 아니라 미디어가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재앙 말입니다. 너무나 중대한 변화, 돌연변이라는 뜻에서의 재앙 말입니다. 세계의 종말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위기일 뿐만 아니라 재앙입니다. 위기와 재앙은 다릅니다.
(박) 그럼 거의 재난의 지경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건데, 그렇다면 미디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서 우리가 지금 말씀하시는 카타스트로픽한 그런 상황을 극복할 수 도 있습니까? 아니면 미디어 자체가 결국은 어떻게 우리가 해볼 수 없을 만큼 결국 그런 힘을 갖고 있는 건가요?
(장 보드리야르)
미디어나 유전학 영역에 윤리나 도덕적 규칙이 가능한 가에 대해서는 저는 부정적 입니다. 또 환상을 품고 있지도 않습니다. 미디어는 가치를 없애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시뮬라시옹은 진실도 거짓도 아닙니다. 더 나쁜 것이죠. 미디어의 정보 또한 진실도 거짓도 아니고, 도덕적이지도 부도덕하지도 않으며 선과 악을 넘어서 있습니다. 효율적인 조정 역할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세계화는 규제를 철폐하는 것입니다. 미디어가 이러한 규제 철폐의 첫 열매였습니다. 심지어 정치 권력도 어느 면에서는 미디어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미디어가 어떤 방향으로 간다고도 말 할 수 없습니다. 정치 권력이 미디어를 조정한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정치 권력이 오히려 미디어에 의해 이용당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디어는 사람도 아니고, 미디어에는 주체도 없습니다.
(박) 근데 말씀을 듣다보면 결국은 미디어를 규제하고 사용하는 방식에 의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건데 그럼 결국 미디어를 없애는 것밖에는 해결책이 없겠군요? 그렇습니까?
(장 보드리야르)
네, 미디어를 잊고, 잊을 수 있어야 하겠죠. 단지 옆으로 지나가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이미지는 생명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초상권이 있는 세계를 되찾아야 합니다. 생명력 있는 이미지의 환상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넘쳐 나는 이미지, 불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 존재, 우리 자신의 이미지를 빼앗는 그런 이미지들 가운데서 미디어를 제외한 채 우리 자신의 이미지를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막에 은둔해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사막이나 해결책이라고 해야하겠군요.
(박) 그러니까 미디어로부터 벗어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군요.
(최) 거기에 대해서 이런 방법은 어떨까 생각을 해봅니다. 선생님한테도 드리는 질문이 될 수 있겠는데, 아까 중간부분에 잠깐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미디어라는 어떤 새로운 가상세계라든지 시뮬라시옹의 세계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물이 흐르는 것처럼 흘러가게 함께 총담을 하고 있지만 거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감염이 되어가고 있지만 거기에 완전히 감염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종합 적으로 포함하고 이해해서 그 자체를 하나의 공격의 수단이나 저항의 수단이나 어떤 방법론으로 이용해서 마치 창과 싸우기 위해서 창을 드는 것 같은 그와 같은 방법론으로 미디어의 흐름은 인정하지만 그 자체 내에서 종합적인 사고를 통해 자기 자신의 아이덴티티나 위치를 다시 찾아가는 저항적인 방법을 아까 아티스트들이 하는 하나의 일종의 방법이란 얘기를 하셨는데, 그 방법 역시도 어떤 하나의 해결책 의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하는데,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장 보드리야르)
전환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지에 잠겨 있는 상황에서, 정치적인 혁명이 아니라 정신적인 구조의 전복이 가 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될 수 있을 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오랫동안 미디어가 활용해온 방법인 아이러니라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디어를 반어적으로, 전복적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60년대 미국, 미국 문화에 반한 운동을 보면, 광고, 라디오, 텔레비전, 낙서, 건축 등 을 보면 방향을 돌리는 미디어의 전복적인 시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가능성은 일회적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해결책일 수는 없습니다. 일회적인 방법들이 있기는 있습니다.
(박) 근데 아까 코디 최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술도 그런 전복의 가능성을 주는 수단이다 이런 말씀이죠? 그렇죠? 제가 말씀듣기로는 미디어 아트같은 선생님 이 하시는 그게.. 가능성을 가져다주는..
(최) 미술사적으로 또 인류 역사적으로 모든 예술가들이 하던 일들은 그 시대적인 흐름에 대해서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항상 저항하고 거기에 또 다른 철학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그런 일들을 해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대적인 흐름에 저항하기 위해서 예술가들이 과거 지향적으로 돌아갔던 경우는 한번도 없었죠. 그 시대를 인식하고 그 시대의 방법론 안에서 어떤 저항적인 방법을 찾아봤지, 과거 지향적으로 과거로 돌아가서 어떤 방법을 찾으려고 했던 것은 한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김) 제가 보기에는 미디어 바깥에도 현실이 존재한다는 걸 전혀 깨달을 수 없는 세태들이 앞으로 나타날 겁니다.
(최) 당연하죠. 네. 그 안에서 또 틀림없이 젊은 친구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저항의 방법을 반드시 찾아갈 겁니다.
(박) 그런데 결국은 아까 미디어를 통해서도 가능성이 있다고 그러셨거든요. 미디어의 논리랄까. 미디어의 규칙이랄까 이런걸 비틀음으로써 그걸 해볼 수 있다. 마치 반문화주의자들이 시도했었던 것 같은 유사한 방법으로 한번 전복을 시도해볼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죠?
(최) 또 하나는 그렇죠. 또 하나는 이런 식의 논리도 한번 이론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가 제 아들이 지금 유치원을 갓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는데, 유치원에 들어갔던 아들이 동물원에 다녀와서 호랑이를 그리겠다고 하면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컴퓨터 선상에서 모든 호랑이의 데이터를 받아들여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봤거든요. 근데 그 자체를 보게되면 그 안에서 흐르는 흐름이 철저한 시뮬레이션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이미지 자체가 그 스스로 자가 발생적으로 계속 끊임없이 이미지가 이미지를 만들면서 만들어가는 과정에 순환궤도에 놓여져 있더라 하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미지가 또 이미지를 만들면서 돌아가는 순환궤도, 그런 것을 만약에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으로 우리가 만약에 생각을 해본다면 그 순환궤도 안에서 무엇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마치 우리 나라 불교의 윤회사상과 도 굉장히 비슷한 어떤 에너지 관계성을 우리가 생각해볼 수도 있구요. 또 하나는 노장사상이 얘기하는 창조의 근원은 노장자 사상에서 얘기하는 창조의 근원은 무에 있거든요.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주 창조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랬을 때 아예 아무 것도 없는 그것에서 만들어진 이미지의 자가 발생적인 창조가 어떤 면에서 동양적인 입장에서는 아주 창조의 본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막연한 그런 이론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겠죠.
(박) 이미지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시뮬라시옹 시대에 이미지의 순환고리를 오히려 굉장히 창조적인 에너지로 활용할 수도 있겠다. 그런 말씀이군요. 자 그러면 텔레비전과 컴퓨터로 대변되는 오늘날 미디어들이 세상을 어떻게 비추고 있는지 함께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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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보드리야르 선생님께 한가지 또 궁금한 거 질문하겠는데요. 시뮬라시옹 시대가 이대로 계속해서 진행한다면 매트릭스에서 보여주는 시대, 또는 조지 오웰의 1984년에서 보는 것처럼 이미지나 혹은 기호를 통한 완벽한 통제나 조작이 가능한지 그런 시대가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럼 시뮬라시옹이라는 이 책을 통해서 보드리야르 선생님께서 경고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까?
(장 보드리야르)
네, 이미 부정적인 유토피아의 모델은 충분히 있습니다. 조지 오웰은 초기의, 아직 외부 압력에 통제 받는 사회를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통제는 내면화되었습니다. 복제 인간, 인위적인 존재 등등의 로보트, 로보트의 문화, 산업적인 로보트라기 보다 정신적인 로보트 같은 예를 들 수 있겠죠. 사실 영화, SF 등에 이미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류의 것들을 즐깁니다. 반은 아이러니, 반은 만족감을 가지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스펙터클을 보면서, 간격, 즉 거리를 유지합니다. 그렇게 스펙터클에 대해 자기 방어를 합니다. 매트릭스는 캐리커쳐입니다. 어느 날 가상 현실이 실현된다고 해도, 가상 현실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런 가상 현실은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인 관계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관계는 이미 컴퓨터 모델을 통해서 가상화 되었습니다. 공상 과학을 상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그 세계에 있습니다. 매트릭스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의 상상은, 영화의 캐리커쳐 형태일 뿐입니다. 영화가 좋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이 영화에서는 고맙게도 저의 책 시뮬라시옹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시뮬라크르가 모델, 참고로 쓰였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시뮬라시옹을 말할 때, 그것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한 가정이자 일종의 내기였습니다. 그 가정이, 모든 영화의 구성 요소를 지닌 채 연출되어, 서부 영화와 탐정 영화의 면모 등등 그런 형태로 구현되었을 때, 그것은 캐리커쳐로 보였습니다. 시뮬라시옹 이론을 구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범죄영화, 스릴러 같은 것입니다. 재난 영화의 위협을 없애려는 것 같은 것이었습니다. 테러 영화에서 위협을 없애려는 것 같은 것 말입니다. 반면에 911은 테러의 현실이었습니다. 재난 영화와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시뮬라시옹을 현실에 적용한 것이 아닙니다. 이론을 구현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단절이 있습니다. 사건에 선행했던 영화들은 사건을 미리 없애려고, 미리 알려 주려고 만든 것처럼 보입니다. 테러 행위에 대한 예방과도 같은 것이지요. 저는 영화적인, 그런 류의 예상을 별로 믿지 않습니다. 가상 현실의 진실은, 로보트나 클론 그런 영화들에서 보여준 것보다 더 중대하고 위험하며 심오한 것입니다. 좋은 영화들도 있죠, 특히 트루먼쇼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참 좋은 어쩌면 가장 좋은 영화일 것입니다. 볼거리를 주는 방법은, 사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는 것에서 볼 수 있 듯이 매우 내면화되어 있습니다.
(박) 지금 보드리야르 선생께서 그러잖아요. 이미지나 기호의 세계에 의한 완벽한 통제나 조작의 세계라는 건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것, 사실 우리 현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심각하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김갑수씨 보시 기에 우리 사회에서는 어떻게 보세요? 우리 사회에서도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라고 보시는 건지...
(김) 제가 오늘 저 보드리야르 선생님께 공부하러 왔는데 한국 설명 담당.. 그런 기분이 드네요. 작가 박완서 선생이 했던 얘기를 한번 기억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나는 세 개 문명권에서 살았다. 어린 시절 고향 농촌 마을에서는 전근대 삶을 살았다., 봉건시대 문명 비슷한 거죠. 그 다음에 성장해서는 산업 문명에 살았다. 그 다음에 나이가 들어서 지금은 정보화 사회에 살고 있다. 이걸 사회학자들은 비동시성의 동시성 이렇게 말하는데, 우리 사회 특징입니다. 전혀 시대적으로 다른 문명권이 공존하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말씀하신 대로 이미지가 우리 사회에 어떻게 작용하느냐는 받아들이는 그 문명 체험에 따라서 어마어마하게 다르다는데 주목해야 될 것 같아요. 1990년대 이후 생을 보통 분수령으로 이야기하는 수가 많습니다. 지금 어린 세대들은 방송 매체라든지 온갖 것을 통해서 떠돌아다니는 이미지나 기호나 이런 것을 통해서 반응하는 게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일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세대별로 굉장히 다릅니다. 앞으로 점점 바로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주력이 되가는 세상을 우리는 맞이하고 있겠죠. 세대 별로 반응차가 굉장히 크다는 현상 이걸 주목해야 되겠다. 이게 제 말씀입니다.
(박) 네. 그런데 시뮬라시옹 이론을 철학적으로 해석하자면 아마 이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존의 가치들, 그러니까 가장 중심적인 거라는 건 데카르트 이후에 이분법적인 가치체계라고 얘기할 수 있겠죠. 근데 그런 것들은 무너진 상황인데, 그러나 그것을 또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체계는 나타나지 않는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혼돈스러운 그런 세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니냐. 철학적인 해석을 한다면 그런 게 가능할 것 같은데 보드리야르 선생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바로 그런 거였습니까?
(장 보드리야르)
두 가지 의미의 카오스를 말할 수 있겠죠. 완전한 혼돈으로서의 카오스는 아닙니다. 우리가 당면한 카오스는, 이론이나 재앙의 의미에서, 완전한 돌연변이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확률의 과학이 있죠. 미미한 원인으로 엄청난 결과가 일어나는 그런 과정이 바로 우리가 겪고 있는 카오스의 과정입니다. 가장 적은 규모의 뭔가도 기술적인 효력 때문에 더 큰 재앙을 촉발시킬 수 있습니다. 이성적인 세계는 그러한 이른 바 타락한 그 결과에 무방비 상태입니다. 세계의 종말이라는 의미로서의 카오스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법칙이 있습니다만 잘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변화하는 이 세계에 일종의 논리가 있습니다. 카오스의 게임을 해야 합니다. 신들도 카오스와 게임을 했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상황입니다. 기원의 상황도 카오스였습니다. 뭔가의 기원에 되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박) 그러니까 그 말씀은 뭐냐면 지금 혼돈 속에서도 확실히 뭔가 우리가 포착해낼 수는 없지만 움직임의 논리라는 게 있다. 그런걸 찾아내면 된다 그런 말씀이신 것 같은데?
(최)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에는 이제 저같은 경우는 이와 같은 현상이 보는 각도에 따라서 혼돈으로 보일 수도 있고, 흐름으로 보일 수도 있고, 순환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제가 볼 때는 인류 역사 이후 여태까지 아주 굉장히 자연스럽게 계속 이와 같은 모습으로 흘러왔다는 느낌이 굉장히 강하게 들고 있거든요. 이 책을 보면서 인간은 늘 본질적으로 약 두 가지의 욕망을 갖고 있는데, 우선 첫 번째로는 뭔가 어떤 사물을 보게 되면 그것을 똑같이 복제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고, 동시에 그 사물이 자기만의 것으로 독특한 무엇이 되기를 요구하는 그런 욕망이 있습니다 사물에 대한.. 또는 그것이 이미지가 될 수 있구요. 이런 이중적인 욕망이 항상 동시에 공존하기 때문에 인류 역사 이후로 계속 끊임없이 사람들은 무엇을 복제하고 거기에서 또 독특한 자기의 무엇을 찾기 위해서, 아이덴티티를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혼란한 가운데 계속 지내왔다는 거죠. 근데 거기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기계 혁명 이후에 또 전자 혁명 이후에 또 발전한 산업사회 기계혁명, 기계사회, 테크놀러지의 문제 거기에 또 자본주의가 함께 우리를 자극시킨 우리의 욕망의 문제, 이런 것들이 합쳐지면서 굉장히 심도깊은 복잡한 혼란과 같이 보이는 어떤 순환기의 흐름이 있을 뿐이지 실질적으로 이것을 극히 우리는 현대사회의 끝에 온 혼란의 끝에 왔구나 과연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입장입니다.
(박) 근데 아까 말씀하신 게 신도 혼돈 속에서 세계를 창조해냈다 그러셨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새로운 창조를 준비하는, 어떤 새로운 국면을 준비하는 뭐라고 그럴까요. 역동적인 움직임의 혼돈 이렇게 볼수도 있을 것 같아요.
(김) 그런 점에서 선생님께 질문 좀 하나 드리겠는데요. 앞으로 시뮬레이션 현상이 아주 극단화돼서 아주 완결적으로 되는 시기가 가령 100년 후에 온다고 했을 때 지금 우리와 그때 사람들은 같은 인간입니까?
(장 보드리야르)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누구도 인류가 어떻게 될 지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인류가 사라질 수도 있고, 인류가 인위적인 종을 만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인류는 인위적인 종으로 자신을 대치하는 성향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가 사라져야 한다면, 인류로는 사라질 지 몰라도 클론, 복제인간으로 살아 남을 수도 있습니다. 100년이 될 지 200년이 될 지 모르지만, 부정적인 운명을 생각해 볼 때, 인류가 사라져야 한다면 복제 인간으로 사라지기보다는 자연적으로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도 없습니다. 우리가 온 길, 그 갈 길의 끝에 가면 다른 가치 체계가 있을 지 알 수 없습니다. 인류의 모든 가치 체계는 생물학적인 인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몸과 성, 죽음 등 등 그 모든 것을 없애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가치가 있으려면 그와 동등한 것이 필요합니다. 신이던 자연이던 초월적인 실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컴퓨터나 다른 것으로 작업하는 세계는, 전혀 초월적이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수평적, 기능적, 조작적입니다. 기능하기 위해서는 가치가 필요 없습니다. 기술에 의해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카오스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입니다. 방향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가속화되어 순환할 때는 의미도 방향도 없습니다. 무질서한 입자 운동, 브라운 운동 같은 거죠.
(박) 혼돈이라는 게 절명을 뜻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까 보드리야르 선생 말씀하셨 던 것처럼 신도 혼돈을 가지고 세계를 창조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장 보드리야르)
아니죠. 비관적 낙관적 가치는 심리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입니다. 어쨌건 저는 비관이나 낙관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으려 애씁니다. 게다가 낙관적인 태도를 허락하는 것이 없습니다. 시니컬한 태도도 아니고 단지 객관적인 태도를 취해야겠죠. 우리의 상황이 수용 가능하건 아니건 그것은 비관주의의 문제가 아닙니다. 허무주의자가 될 수는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점에서 저를 비난하기도 하죠. 가장된 가치보다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시뮬라시옹보다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허무주의자입니다. 그러나 능동적인 허무주의입니다. 절망이 아니라 명철에서 오는 것입니다.
(박) 아까 처음에 시뮬라시옹 이론에 대한 설명을 하시면서 지금 가상세계의 국면 이라는 것은 시뮬라시옹을 넘어선 그런 상태다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렇죠?
(장 보드리야르)
네, 어떤 면에서는 그렇죠. 시뮬라시옹은 중간 단계입니다. 산업물, 생산물, 소비 모델, 패션 모델에 유사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이퍼 시뮬라시옹 단계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상태를 말하기에는, 시뮬라시옹이라는 단어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가상성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시뮬라시옹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더 효력이 강해진 상태입니다. 현실이 없을 때는, 시뮬라시옹도 없습니다. 시뮬라시옹이 있으려면 현실의 축이 필요합니다. 비교와 교환이 가능해야 하니까요.
현실과 시뮬라시옹의 교환이 일반화되면 진정한 시뮬라시옹은 없습니다 라캉이 말했듯이, 언어는 거짓말을 하지도 또 할 수도 없습니다. 그 물질성으로 언어를 보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그것일 뿐입니다. 언어 자체는 진실과 거짓 너머에 있습니다. 가상성 그 자체는 현실과 가장된 것 너머 있습니다.
(박) 컴퓨터하고 디지털 기술에 의해서 가능해진 가상 현실 시대에는 이미 시뮬레이션의 국면은 지났다고 생각해야 되겠군요?
(장 보드리야르)
저는 컴퓨터에 문외한입니다. 저는 컴퓨터가 없어요. 제 아들은 완전히 사이버, 컴퓨터 활동에 빠져 있습니다. 현실적인 삶을 가진 데서 오는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기술성과 화합의 경지에 있습니다.
(박) 용어를 하나 새로 만들어내셔야 되겠는데요. 가상현실의 시대를 지칭하기 위한 용어를 따로 하나 만들어내셔야 되겠어요?
(최) 그런 경우에 어떤 젊은 층에서는 버츄얼 소사이티나, 이쪽 계통을 시뮬라시옹에 기원을 두면서 심지어는 포스트 하이퍼 시뮬레이션, 포스트 하이퍼 리얼리티 이런 식으로 부르는 흐름도 있습니다.
(박) 자 그러면 조금 시사적인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작년에 우리가 9.11테러 사건을 전세계적으로 경험했었는데요. 자 그 테러사건은 미국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보드리야르씨 의견에 의하면 포스트 모던한 가장 포스트 모던화된 나라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그 9.11테러 이후로 오히려 사라진다고 말씀 하셨던.. 현실적인 체계의 실제성이라는 것은 더 강화되고 있는 게 아닌가. 애국심에 호소를 한다든지 안보에 호소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해서 기존의 현실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체계라는 것, 이런 것들의 실제성이 오히려 더 강화되는 거지, 지금 시뮬라시옹의 세계로 가고 있다는 느낌은 안 들거든요. 어떻게 보십니까? 오히려 뒤고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 보드리야르)
9.11 테러의 공격은, 시뮬라시옹, 공론, 세계화 등의 힘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뮬라시옹에 반대하는 힘입니다. 9.11 테러 행위로부터 새로운 가치 체계가 다시 생겨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지속될 것이며 세계화도 계속될 것입니다.
9.11 테러가 세계화를 중단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계화, 세계의 힘이 상징적인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상징적인 힘,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힘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진 타격은 아니었습니다. 그 힘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가해진 것입니다. 이슬람 세계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받아들일 수 없기에 가해진 격렬한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 의미도 부여하지 않습니다. 테러 행위로 가치 체계를 복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뮬라시옹의 가치 체계 또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는 시뮬라시옹 너머의 것입니다. 시뮬라시옹에 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현실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공격하고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결과는 세계의 흐름인 정치나 전쟁 같은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이 행위 자체는 시뮬라시옹 너머, 현실 너머에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원해왔던 꿈꿔왔던 환상이 실현된 것입니다. 환상의 실현은 현실의 차원도 시뮬라시옹의 차원도 아닙니다. 뭔가를 바꾸는, 진정으로 심오하게 힘을 건드린 결정적인 행위입니다. 일종의 욕망, 복수, 도전, 아주 강한 충동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 류의 사건은 시뮬라시옹의 현실 문제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사건들은 매우 중요합니다.
(박) 그래요. 9.11 테러 사건이라는 것은 시뮬라시옹의 세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실 세계 현상도 아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실현된 환상의 세계다. 그게 참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지금 그 문제에 대해서 이 책에서 서술을 하고 계십니다. 이 책의 제목이 레스프리 디 떼러리슴.. 그러니까 테러리즘의 정신.. 굉장히 얇은 책인데 이 책에서 아마 시뮬라시옹 이론을 적용해서 9.11 테러 사건을 설명하고 계신 것 같아요.
(박) 자 그럼 말씀 여러 가지 들었는데요. 마지막으로 덧붙여서 질문하고 싶은 게 있으시면 하시고 아니면 논평하실 거 있으면 하시고 그러죠. 최선생님..
(최) 아까 보드리야르 선생님께서 방금 본인이 얘기했던 시뮬레이션 이론은 이미 디지털의 버츄얼 리얼리티, 그 세계관은 벌써 시뮬레이션 이론을 지났고 어떤 중간 단계, 어드밴스드된 그런 단계다.. 그런 얘기를 하시면서 실제적으로 시뮬레이션과 이론과 그쪽과는 어떤 분리 현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식의 대답을 주셨는데 한번 직접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어서 하나 질문 드리겠습니다. 선생님, 뉴욕의 많은 학생들은 선생님을 ....포스트 모던 사이버리아의 낭만주의적 이론가다. 이런식의 젊은 학생들이 선생님을 지칭하는 명칭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는 네버 마로비치라든지 기타 많은 뉴미디어 이론을 쓰시는 분들이 항상 선생님의 시뮬레이션 이론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그 부분에 관계를 지어서 얘기를 끌고 나가는 경향들이 많은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이래 미국 이론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뮬라시옹에 대한 아주 강한 저항도 보입니다. 너무 일반화한 얘기지만, 미국 이론가들은 지성적이면서도 실용주의적이기 때문에, 이런 환상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뮬라시옹 이론에 매혹을 느끼는 예술가도 많지만 저항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메리카라는 책에서, 미국의 영광은 아니지만, 제가 좋아하는 아메리카를 묘사했는 데 미국인들은 미국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결국 완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항상 오해가 있습니다. 강한 매혹과 그 반대의 위축이 있습니다. 특히 제 책 테러리즘의 정신의 논지에는 전혀 동의의 여지도 없습니다.
(박) 김갑수씨는 무슨 질문 있으세요?
(김) 질문이 아니고 그냥 제 의견.. 보드리야르 선생님 말씀 통해서 들어보면 이 시뮬라시옹 시대로 가는 게 꼭 부정적인 미래 진단만은 아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 데, 저는 아날로그형 인간이어서 그런지 들을 때는 상당히 미래가 공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문명의 추이 이전에 한 개인은 한정된 자기 시간을 살다 갈 따름이거든요. 어떤 생각을 하게 됐냐면, 일단 우리는 너무나 많이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고 신문, 텔레비전, 그 다음에 휴대 전화도 포함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라디오, 온 갖 것들 이런 걸 통해서 삶의 현실을 확인하는 그런 게 있는데, 어쨌든 그런 미디어로부터 독립되어있는 떨어져있는 자신의 삶의 공간을 확보해야된다. 그것이 미래 인간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그 많은 그 무수한 이미지의 포화 속에서 좀 벗어나 있는 자연적인 삶의 상태를 확보하는 것이 꼭 필 요하다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봤습니다.
(박) 같은 말씀을 아까 하셨던 것 같아요. 미디어로부터 거리를 두고 미디어로부터 독립해 살 수 있는 삶, 그런 것에 대해서 아까 말씀하셨던 것 같거든요.
(김) 어느 정도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지만요. 개인적인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령 이 프로그램 빼고 밤에 텔레비전 안 키면..
(박) 근데 이 프로그램은 봐야 될 것 같아요. 바로 이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라 도..
(최) 근데 동시에 아까 보드리야르 선생이 말씀하셨던 대안은 아니지만 대안 비슷 한 얘기 중에서 선생님이 얘기하신 그런 쪽에 부분이 있구요. 또 그 반대편의 부분 이 있는데, 그 게임에 들어가서 게임을 즐겨라 하는.. 저는 그쪽입니다. 철저하게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이 새로운 미디어 소사이티, 버츄얼 소사이티, 그래서 이쪽 가능성으로.. 저는 당연히 우리가 처해있는 환경이 여기 있다면 그 게임 안으로 내가 들어가서 그 게임 속에서 미래를 바라다보는 것이..
(박) 두 분 말씀 맞습니다. 아까 그런 말씀하셨는데, 미디어에 관해서는 미디어 속
에 들어가서 게임의 논리를 비트는 방식으로 미디어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방
법, 또 김갑수씨 얘기했던 것처럼 미디어로부터 스스로 자기를 고립시켜서 그 영향
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 두가지 다 가능성으로써 말씀하셨던 것 같아요.
네. 자 그러면 보드리야르 선생님께 마지막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본인은 스스
로를 테러리스트라고 그러셨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죠?
(장 보드리야르)
먼저 두 분의 두 가지 해결책에 동의합니다. 테러리즘은 은유입니다. 이 세계가 그 의미를 잃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시스템보다 더 멀리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스템을 극단으로, 그 절정으로 밀어 붙여야 합니다. 이 때 테러리즘은 폭력적인 행위가 아니라 형태입니다. 예술, 언어도 그러한 테러리즘의 형태일 수 있습니다. 그 형태는 시스템의 모순을 따라가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멀리 가면서 같은 논리로 게임을 하는 것, 즉 전략적으로 상황을 전복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테러리즘입니다. 그것이 제 사변이고 이론입니다. 거기에는 도전, 내기가 있지요. 이성적인 논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위험도 있지요, 틀릴 수도 있고 또 반대 방향으로 갈 수도 있지만 끝까지 가서, 적어도 끝을 너머 무엇이 있는 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볼 수는 있겠죠.
(박) 그런 취지에서라면 두 분 다 테러리스트가 되실 수 있겠어요. 예술을 통해서 또 김갑수씨께서는 언어를 통해서 테러리즘을 행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네. 자 시청자 여러분 오늘 프로그램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많이들은 얘기 중에 하나가 시뮬라시옹이라는 책을 흥미가 있어서 사긴 샀는데, 몇 페이지 보고 나니까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어서 책장에 꽂아두고 그냥 가만 내버려뒀다는 그런 분들이 꽤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이 그 분들로 하여금 시뮬라시옹의 이론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그런 계기가 돼서 책장으로부터 책을 끌어내서 읽게 되시는 그런 시간이 됐으면 바랍니다. 자 그럼 저는 여러분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오늘 나와주신 장 보드리야르 선생
님 감사드리구요. 토론자께도 감사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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