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
대략 1916 취리히에서 후고 발이 카바레 볼테르를 열었을 때부터,
1920년대 초 파리에서 이 운동의 종말을 고한 때까지라고 할 수 있다.
지역:
폭넓은 국제적인 지지를 받았다.
취리히 문학 프로그램, 베를린 정치적인 항거, 쾰른 새로운 예술적 기법의 발전...
대중에게도 보급되었다. 쾰른의 잡지 '데어 벤틸라토르' 4만부, 베를린 다다 공연 2천명 관객...
의의:
세계 젊은이들이 당대의 정치 사회적인 격변에 반발하는 사고방식의 표현.
배경:
1916년 취리히는 전쟁터 한가운데 위치한 평화지역이었다.
유럽 전역에서 젊은 예술가, 반전주의자, 혁명가들이 이 곳에서 도피처를 찾았다.
뮌헨에서 철학과 독일 문학을 공부한 후고 발도 그 중 한 명.
트리스탄 차라, 한스 리히터, 마르셀 장코, 한스 아르프, 리하르트 휠젠베크 등도 마찬가지.
그들은 전쟁에 대한 혐오감과 징집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곳으로 몰려들었고, 전쟁을 일종의 영웅적인 사회 경험으로 이상화하는 순진한 유혹에 절대 빠져들지 않았다.
모든 규칙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와 기존의 모든 장애의 파기는 전쟁에 대한 유일하게 적절한 반응인 것 같았다.
용어:
여러 다다이스트가 서로 그 명칭을 고안했다고 주장했다.
가장 믿을 만한 설명은 리하르트 휠젠베크가 기록한 것, "다다라는 명칭은 후고 발과 내가 우리 카바레의 가수인 르 로이 부인을 위한 이름을 찾으려고 프랑스어-독일어 사전을 뒤적이다 우연히 발견했다. 다다는 프랑스어로 흔들 목마를 의미한다. 우리는 그 명칭의 간결함과 함축성에 반했고 얼마 안 되어 다다는 카바레 볼테르에서 우리가 하고 있던 모든 예술 활동에 대한 칭호가 되었다."
이 천진난만한 어린애 말투 같은 용어에서 다다이스트들은 모든 부르주아적인 관습과 정치인들의 전쟁 도발에 대한 혐오감, 자신들의 허무주의를 나타내기에 적합한 표현을 발견했다.
활동:
[소리-시] 시어들은 발음에 의거한 개개의 음절로 분해되어 어떠한 의미도 띠지 않게 됨. 후고 발, "이 소리-시로써 우리는 언론이 구제불능으로 무미건조하게 만들어버린 언어를 무시하고자 했다."
[동시 시] 여러 명이 동시에 시를 낭송하는 것.
[무작위 시] 무작위 원칙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다이스트들은 자신들의 창조적 영향력을 미리 정해진 단 몇 가지 정보로 극소화할 수 있었다. 1916년 트리스탄 차라, "다다 시를 창작하려면 우선 신문을 집어라. 그리고 가위를 들고 원하는 시의 길이만한 기사를 선택해서 그 기사를 오려낼 것. 그런 다음, 기사에 실린 각 단어를 제각기 오려내어 가방 안에 그 조각들을 집어넣어라. 가방을 한번 가볍게 흔들어줄 것. 그러고 나서 한 조각 한 조각 집히는 대로 꺼내어라. 꺼낸 조각들을 세심하게 한 자 한 자 적어놓을 것. 드디어 너 자신과 흡사한 시 완성!" 20세기의 미술가들은 '무작위 시' 기법에 해당되는, 콜라주나 포토몽타주 기법 같은 유사한 회화 제작 기법에 자꾸 되풀이해서 의존했다.
확장:
후고 발 1917는 티치노로 떠남.
한스 아르프 1919년 취리히를 떠나 쾰른에서 막스 에른스트를 만남. 에른스트와 요한네스 테오도르 바르겔트와 함께 쾰른 다다 그룹 창설.
리하르트 휠젠베크는 베를린으로 돌아감.
트리스탄 차라만이 취리히에 남아 2년 여간 활동을 했고, 1920년 파리로 떠나면서 취리히 다다이즘은 막을 내림.
이 무렵 다다이즘은 하노버나 쾰른 같은 덜 국제적인 도시뿐만 아니라 베를린이나 파리 및 뉴욕 등지에서 계속되며 가까스로 절정에 다다라 있었다.
[베를린] 1918년 1월 I.B. 노이만 미술관에서 리하르트 휠젠베크는 "오늘 저녁은 2년 전 취리히에서 찬생한 새로운 국제 '예술 경향'인 다다이즘을 동조하는 시위로 의도된 것" 이라 선포. 이후 요한네스 바더, 조지 그로스, 라울 하루스만, 한나 회흐, 존 하트필드 등이 동조.
의성어에서 따온 다다라는 용어는 독일의 사회 상황에 대한 그들의 불편한 심기를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처럼 보였고 취리히의 활동에서 사회 비판에 예술적 형식을 부여할 수 있는 전례를 찾았다.
1918년 4월 리하르트 휠젠베크는 다다를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클럽으로 소개. 스위스의 전례는 몇몇 무정부주의적 특징을 지닌, 근본적으로 문학적인 카바레였던 반면에 클럽 다다는 드러내놓고 정치적인 자세를 견지.
베를린 그룹은 포토몽타주 기법을 활용해 다다의 형상을 다양하게 구사. 취리히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러시아 구성주의와 이탈리아 미래주의에서는 선구적으로 사용된 바 있음. 익히 알려진 콜라주 기법을 사진 조각들을 첨가해 확장시킨 것. 사진이 지닌 사실성으로 인해 콜라주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
1920년 6월 '제1회 국제 다다 전시회'는 다다이스트들이 전시회라는 수단으로 자신들의 운동의 국제적인 성격을 기록하기 위해 벌인 유일한 시도였으나, 대중의 무관심과 악평속에서 끝나는 것으로 베를린 다다의 종말을 알렸다.
[하노버] 쿠르트 슈비터스
[쾰른] 폭넓은 다다 운동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에른스트, 바르겔트, 아르프 이 셋에 집중.
막스 에른스트는 자신의 '전기 형식의 기록'에서 "콜라주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가령, 막스 에른스트는 그것을 이렇게 정의했다. 콜라주 기법은 서로 상이한 둘 혹은 그 이상의 실재가 확연히 부적절한 차원에서 충돌하며 우연히 또는 인위적으로 유발되는 대립을 체계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재가 서로 접근할 때 튀는 시적인 불꽃이다." 그의 묘사는 실제로 베를린 다디이스트들의 풍자적이거나 공격적인 정치 몽타주보다는 초현실주의적 화법에 더 가깝다.
[뉴욕] 주로 망명한 유럽 예술가들이 중심. 두 명의 프랑스인 마르셀 뒤샹과 프란시스 피카비아는 1919년에 이곳에서 만나 만 레이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윌터 아렌스버그와 어울렸다.
베를린과 달리 무정부주의적 정치적 쇼에는 관심이 없었음. 취리히나 파리와는 대조적으로 뉴욕의 다다이스트들은 문학인이 아니라 만 레이, 뒤샹 등의 미술가들.
마르셀 뒤샹의 1917년 <샘>은 다다이즘의 반예술 개념으로 충분치 않다. 뒤샹은 기존 예술 개념에 대한 다다이스트들의 거부와 파괴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예술과 반예술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이 과정이 논리적인 결론에 이르게 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미술 작품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미술 작품을 어떻게 인지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미술 작품을 다루는가' 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처음으로 레디메이드는 미술 작품의 정의와 평가를 위한 문맥의 중요성에 관람자의 관심이 쏠리게 했다.
[파리] 1918년 11월 11일 휴전이 된 후에야, 루이 아라공, 앙드레 브르통, 필리프 수포, 트리스탄 차라가 파리로 돌아왔다. 1919년에는 프란시스 피카비아와 마르셀 뒤샹이 뉴욕에서 돌아왔다. 만레이도 2년 뒤 그들을 좇아 파리로 왔다. 한스 아르프는 1920년 파리에 왔다. 1922년 막스 에른스트가 파리로 이주했다.
파리에서도 문학 운동이 다다를 이끌었다. 그러나 짤막한 낭송이나 시, 음악, 춤 등으로 떠들썩하게 공연했던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와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출판물을 통해 자신들을 표현했다.
앙드레 브르통은1920년 자동기술법을 발견했다. 프로이트를 만났고, 자동기술법과 우연성을 도입하고 잠재의식을 끌어냄으로써, 다다이즘의 공격적이고 도발적이며 풍자적인 글쓰기를 창조 과정에서 어떤 이성적인 통제도 배제한 문학으로 대체했다. 1924년 브르통은 자신의 새로운 통찰을 '첫 번째 초현실주의 선언문'에 담아 출판.
예술가:
[한스 아르프]
Hans Arp, Squares Arranged According to the Laws of Chance, 1917
우연성의 원칙이 이 작품의 기초. 12장의 채색 종이를 모두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로 오려서 마분지에 떨어뜨렸다. 이렇게 이루어진 종이 배열은 그 다음의 '배열 과정'조정에 영감을 주었다. 최종 결과는 구성의 질서와 우연성의 원칙 사이에 내재하는 균형.
여기서 사용한 기법을 같은 시기에 막스 에른스트도 사용했다. 1920년대에 가서 무작위적이고 자제할 수 없는 기법을 미술과 문학의 창조 원칙으로 삼은 자들은 초현실주의자들.
[라울 하우스만]
Raoul Hausmann, Tatlin Lives at Home, 1920
포토몽타주 기법의 기원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양했다. 라울 하루스만은 1918년 한나 회흐와 발트 해안에서 휴일을 보내던 중 그 기법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어느 사진관 진열창에서 그들은 우연히 사진 속 인물들의 얼굴이 다른 얼굴들로 대체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포토몽타주 기법은 베를린 다다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인쇄된 텍스트 부분과 사진 이미지의 사용을 통해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입체주의 콜라주를 더 진전시킨 이 기법을 시도했다. '몽타주'라는 명칭은 작품에서 어떠한 '예술적인' 특성도 박탈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채택한 것.
<타틀린은 집에서 산다>는 러시아 구성주의 미술가인 타틀린의 초상을 보여준다. 기계 장치, 생물체 구조. 유기적 세계와 기계적 세계는 하우스만의 포토몽타주를 형성하는 양극단이다.
<존 하트필드>
John Heartfield (in collaboration with George Grosz), Sunny Land, 1919
누가 포토몽타주 기법을 처음 사용했는가를 놓고 라울 하우스만과 다투었다. "1916년 존 하트필드와 내가 5월 어느 아침 5시에 나의 사우스 엔드 작업실에서 포토몽타주를 창안했을 때 우리는 둘 다 앞으로 이 창안이 가져올 커다란 잠재력이나 어렵지만 성공적인 행로에 대해 전혀 짐작도 못 했다."
확실히 이 두 미술가는 하우스만이 했던 것보다 한 수 위의 기법을 구사해 논리적으로 마무맇ㅆ는데, 그들은 그려서 묘사하는 대신 그림에 오려낸 조각들을 부탁하는 과정을 통해 포토몽타주 작업 자체를 더 중요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미술 작업 과정을 재정의했다.
Marcel Duchamp, Fountain, 1917, replica 1964
레디메이드는 마르셀 뒤샹이 창안한 새로운 자율적 미술 양식이다. 그것은 공업 생산된 실용푸이 단지 선택과 제시의 과정을 거쳐 미술의 지위를 획득한 것이다. 뒤샹은 이러한 작품을 디자인하지 않았고 단지 자신이 발견한 오브제를 정의상 미술 작품이라고 칭했을 따름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천재적인 창조자라는 미술가에 대한 전통적인 신화에 찬물을 끼얹었다.
뒤샹의 모든 레디메이드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즉, 한 오브제를 미술 작품으로 규정하는 특성과 조건은 무엇인가? 그리고 마르셀 뒤샹은 가능한 한 정확하게 스스로 이 물음에 대답하려 했다. <샘은> 공업 생산된 소변기인데, 뒤샹은 그것에 미술 작품의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 세 가지 변화를 주었다. 첫째 그는 그것을 받침대 혹은 대좌 위에 앉혔고, 둘째 거기다 서명을 하고 연도를 기입해놓았으며, 셋째 그것을 현대 미술전에 출품했다.
뒤샹은 오브제가 우선은 맨 먼저 그것이 본래 속한 문맥에서 이해되며 다른 환경에서는 다르게 인지된다는 것을 알았다. 미술에서 그가 이룬 선구적인 업적은 미술작품의 평가를 위해 이러한 문맥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이었다.
<요한네스 바더>
Johannes Baader
<쿠르트 슈비터스>
Kurt Schwitters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만 레이>
Man Ray
<프란시스 피카비아>
Francis Picab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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