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10 December 2014

New Aesthetic

New Aesthetic


제임스 브라이들 James Bridle이 제안한 개념으로 아직 뚜렷이 정의되지는 않았지만 우선 디지털 기술의 등장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현실에 대한 비평적 관점 정도로 이해하자.

“New Aesthetic은 예술 운동도 아니고 행해 질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이것은 멀리있는 그렇지만 겹쳐있는 우리의 현실들에 존재하는 차이과 간극을 인식하는 잡다한 네트워크의 인공물(artifact)이다.”

제임스 브라이들 자신이 속해 있는 디자인 그룹의 블로그 포스트에 2011년 처음 이 용어를 썼다. 직접적인 정의 없이 일련의 이미지로 이 개념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설명했다.

제임스 브라이들의 텀블러 The New Aesthetic은 이것의 연장으로, 글로 직접적으로 정의하는 대신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만들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아카이빙하는 것을 통해 이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2012년 한 컨퍼런스(SXSW)에서 있었던, James Bridle을 주축으로 한 패널 토론(The New Aesthetic: Seeing Like Digital Devices) 이후 이 개념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브루스 스털링 Bruce Sterling이 이 패널 토론을 참관했고 이에 관한 글, “An Essay on the New Aesthetic”을 와이어드에 발표하면서, 이 개념에 대한 더 폭넓은 관심이 일어났다.

브루스 스털링의 글을 요약하면.
  • New Aesthetic은 큐비즘처럼 리얼리티를 보는 새로운 관점이다.
  • 예술 운동이다. 발견의 단계가 아니라 실제로 뭔가를 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
  • 현대 네크워크 문화의 토산물로서 런던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디지털에서 태어났다.
  • 사실을 이야기한다. 우리를 둘러싼, 우리가 현재 만들고 있는 것들에 관한 것이다.
  • 이해가 가능하다. 당신 엄마도 이해할 수 있다.
  • 깊이가 있다. 인터렉션 디자인, 컴퓨테이셔널 미학, 감시, 군사 기술 등과 관련된다.
  • 현대적이다. 지금, 여기를 위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 새로운 새대의 것이다. 아날로그의 유산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 조잡하다. 결국은 정리가 필요하다.
  •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 기계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결국 우리 자신의 문제다. [SXSW 패널 토론에서 기계의 시각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토론의 제목이 The New Aesthetic: Seeing Like Digital Devices었다.]
  • 기계적인 동화에 미적 문제를 숨기는 것은 잘못됐다.
  • 기계가 “생각”, “기억", “시각" 등을 가진다는 은유는 기만이다. [브루스 스털링 자신은 인공지능 AI을 믿지 않기 때문에 컴퓨터의 시각 이라던지 하는 표현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 컴퓨터는 제대로된 미적 판단을 할 수 없다. 인식적, 지각적, 지적, 도덕적 면에서 부족하다.
  • 은유는 주의를 끌기위한 형의상학적 책략이다.
  • 진정한 New Aesthetic은 기계가 생산한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다루는 노력일 것이다.
  • 진정한 New Aesthetic이 입자물리연구소 CERN에 있다고 가정하면 그는 왜 일부(전부가 아니라) 수학만 “아름다운가?”와 같은 질문을 할 것이다.
  • 지적으로 솔직한 New Aesthetic이라면 글리치(glitch) 이미지 사냥보다는, 더 큰 시각으로 비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에 더 친근한 태도를 가질 것이다. 엔지니어들의 생산품에 대한 탐욕적 태도는 옳지않다.
  • 하드웨어가 우리의 삶을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심오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 기계가 생산한 이미지에 가치를 주는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의식의 상상에 가치를 두던 것과 같다. 이것은 멋지고, 기이하고, 전복적이고 도발적이지만 빈곤하다.
  • 현대의 미를 해킹하는 대신 구축해야 한다.

브루스 스털링은 이 새로운 개념을 환영하고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개념 정의에 대해 제임스 브라이들과 다른 의견도 피력하고, New Aesthetic의 방향까지 제시한다. 


개념이 모호한 탓에 많은 사람들이 브루스 스털링처럼 저마다의 해석과 의견을 내놓았다. 제임스 브라이들은 2013년 글, “The New Aesthetic and its Politics”에서 자신의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힌다.


제임스 브라이들의 글을 요약하면.
  • 내 드론 작업이 드론 기계가 아니라 이를 둘러싼 기술적, 공간적, 법적, 정치적 시스템에 관한 것이듯, New Aesthetic 역시 아카이빙한 이미지나 인용 등에서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과 분리할 수 없고 그것을 통해 존재하는 것들.
  • New Aesthetic에서 “Aesthetic”은 “미"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처럼 보인다" 정도를 의미.
  • New Aesthetic은 성명서, 에세이, 책 등과 같은 공식적인 형식이 아니라 이것이 다루고 있는 네트워크 자체-텀블러, 블로그, 유투브 비디오, 트윗 등-를 통해 네트워크에 관해 비평을 하는 것.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것에 대해 제대로 인식을 못하고 있다.
  • 아카이빙된 New Aesthetic 이미지들은 이를 생산하는 기저의 시스템,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을 드러낸다.
  • 예를들어, 위성 이미지는 맵핑의 속성에 관한 것이다. 관점과 힘의 관계, 위에서 바라보는 시점을 가진 특권, 이를 생산하는 기술을 독점적으로 가진 회사 등에 관한 이슈.
  • New Aesthetic은 아름다움이나 표면적 텍스쳐와는 관련이 없다. 이것은 네트워크된 기술의 정치와 정치화에 관한 것이다.
  • New Aesthetic은 연결들(connections)의 심오한 응집성과 다양성 그리고 네트워그 자체의 영향에 관한 것이다.
  • New Aesthetic에 대한 얕은 코맨트는 예술에 있어서 기술적인 이해도(technological literacy)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우리는 컴퓨테이션에 의해 형성되고 정의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비평가나 예술가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2014년 현재 여전히 이 개념은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이에 관한 논쟁을 통해, 새로운 흐름에 대한 여러 관점들이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추가 참고자료: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