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소멸
한병철
사물에서 반사물로
디지털화는 사물을 정보기계로, 곧 정보처리 행위자로 만든다. 인간은 자신의 정신적 능력들을 사물에게 넘겨준다. 정보기계는 손을 노동으로부터 해방한다. 오직 체험하고 누리고 놀이하려 하는 인간은 행위와 결합된 자유와 작별한다. 손없는 미래 인간은 역사의 종말의 화신이다.
소유에서 체험으로
오늘날 우리는 소유보다 체험을 더 원한다. 체험하기란 정보를 소비하기다. 사물과의 집약적 관계가 사물을 소유물로 만드는데 정보는 사물처럼 쉽게 소유되지 않는다. 상품성으로부터 해방된 사물들이 있는 유토피아는 우리의 미래가 아닐 것이다. 정보자본주의는 비물질적인 것마저도 상품으로 만든다. 삶 자체가 상품의 형태를 띠게 된다.
스마트폰
스마트폰에서 세계는 총체적 처분가능성이라는 디지털 가상을 띠고 나에게 나타난다. 타인조차 소비 가능하게 한다. 타인을 소멸시킨다. 스마트폰은 사물을 정보로 환원함으로써 세계를 탈사물화한다. 실재와의 사물적 접촉은 일어나지 않는다. 실재는 ‘지금 여기에 있음'을 박탈당한다. 지각은 탈신체화 된다. 스마트폰은 세계를 탈실재화한다.
셀피
디지털 사진은 순수한 가상이다. 그 사진은 대상과 집약적이고 밀접하고 리비도적인 방식으로 결합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은 전혀 다른 시간성을 지닌 사진, 시간적 깊이와 소설적 너비가 없는 사진, 운명과 기억이 없는 사진, 요컨대 순간 사진의 발생을 허용한다. 셀피는 사물이 아니라 정보 곧 반사물이다. 셀피의 본질은 전시다. 셀피의 특징은 디지털 기쁨이다. 셀피는 현재성에 매여 있다. 셀피는 놀이의 성격을 지닌다. 셀피의 특징은 극단적인 자세들이다. 셀피는 인물의 증거가 아니다. 우리 자신을 다양한 자세와 역할로 연출한다. 셀피는 운명과 역사를 짊어진 인간의 소멸을 통고한다. 셀피는 장난스럽게 순간에 빠져드는 삶꼴을 통고한다.
인공지능
인공지능은 생각하지 못한다. 인공지능은 세계가 없다. 의미 지평으로서 전체는 인공지능이 따르는 목표들보다 더 많은 것을 포괄한다. 인공지능은 앞에 주어져 있는 사실들, 자신들과 같게 머무는 사실들을 처리한다. 진정한 앎은 개념의 수준에서 가능하다. 인공지능은 상관관계와 패턴 인식에 국한된 채로 머물며 아무것도 개념화하지 못한다. 생각하기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세계 안에 놓는다. 인공지능은 미리 주어진 것에서 벗어나 다녀보지 않은 곳으로 가지 못한다. 생각하기는 에로스를 먹고 산다. 계산하기는 에로스가 없다. 데이터와 정보는 유혹하지 않는다. 생각하기는 “바보처럼 굴기"를 통해 전혀 다른 곳, 다닌 적 없는 곳으로의 도약을 감행하는데 인공지능은 너무 지능적이어서 바보일 수 없다.
사물의 면모들
사물의 심술
<미키마우스> 초기 에피소드들에서 사물들은 몸시 음흉하게 군다. 그 사물들은 고유한 삶을 살면서 고집까지 부리는, 예측 불가능한 행위자로 등장한다. 찰리 채플린도 초기 영화들에서 사물들의 심술에 무방비로 내맡겨진다. 우리는 이제 더는 사물들에게 괴롭힘당하지 않는다. 디지털화는 세계를 탈사물화함으로써 세계의 탈실재화를 심화한다. 오늘날 사물들은 철저히 복종한다. 우리의 욕구에 종속된다.
사물의 등
비밀로서의 타자, 바라봄으로서의 타자, 목소리로서의 타자가 사라진다. 다름을 빼앗긴 타자는 처분 가능하고 소비 가능한 객체로 전락한다. 타자의 사라짐은 사물 세계에서도 일어난다. 사물들은 고유의 무게, 고유의 삶, 고유의 의미를 상실한다. 디지털 객체의 홍수가 세계 상실을 가져온다. 우울증이랑 병적으로 심화한 세계 결핍을 뜻한다. 디지털화는 우울증을 확산시키는 한 요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의 욕구에 종속시킨다. 오로지 타자의 부활만이 우리를 세계 결핍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다.
유령
정보권 안에는 사물처럼 확실히 잡히는 것이 없다. 반사물은 필시 유령들의 식량이다. 정보기계들은 사물의 고집을 완전히 버렸다. 오로지 기능이 정보기계의 모든 것이다. 정보기계는 명령에 복종한다.
사물의 마법
오늘날 우리는 실재를 지각할 때 무엇보다도 정보를 얻으려고 한다. 정보는 실재를 대표한다. 그러나 정보가 우위를 점하면, 여기 있음을 경험하기 어려워진다. 마법적 세계 관계는 대표, 곧 표상과 의미가 아니라 단박에 맞닿음과 여기 있음이 특징이다. 정보는 맞닿음을 줄인다. 지각은 실재의 여기 있음 층에 진입하여 깊어지지 못한다. 지각은 단지 실재의 정보 표면만 스친다.
예술에서의 사물 망각
예술품은 사물이다. 심지어 시도 사물의 성격을 띤다. 시 짓기는 뜻 형성이 아니라 신체 형성에 공을 들인다. 기표들은 농축되며 기의를 지나쳐 하나의 아름답고 비밀스러운 신체를 이룬다. 그 신체는 유혹한다. 읽기는 해석학이 아니라 촉각학, 만지기, 애무하기다. 읽기는 시의 피부에 밀착하고 시의 신체를 향유한다. 신체로서의 시, 마술로서의 시는 특별한 여기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오늘날 예술은 예술품을 사물로 보는 저 유물론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사물 망각이 예술을 휩쓸고 있다. 소통이 예술을 독차지 한다. 예술이 정보와 담론을 싣게 된다. 예술이 유혹하는 대신에 가르치려 든다.
하이데거의 손
하이데거는 노동과 손을 열렬히 신봉한다. 하이데거의 손은 땅의 질서에 매여 있다. 따라서 그 손은 인간의 미래를 파악하지 못한다. 오래전부터 인간은 더는 “땅"과 “하늘”에 거주하지 않는다. 우리는 초인간적이며 탈인간적인 시대로 나아간다. 그 시대에 인간의 삶은 순수한 정보교환일 것이다. 인간의 미래는 필시 미리 정해진 것 같다. 인간은 자기를 절대화하기 위하여 자기를 없앤다.
충심의 사물
<어린 왕자>에는 충심의 사물이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게 돼. 너는 나에게 유일무이하게 될 거야. 또 나는 너에게 온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될 테지.” 오늘날 우리는 타자를 위한 시간이 없다. 자기의 시간으로서의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타자를 못 보게 만든다. 오로지 타자의 시간만이 강한 결속을, 우정을, 바로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타자의 시간은 선한 시간이다.
고요
신성함은 고요의 사건이다. 그것은 우리를 귀 기울이게 한다. 고요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고요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보자본주의는 소통 강제를 낳는다.
진실은 고요 속에서, 눈을 감을 때 현현한다. 고요가, 눈 감기가 비로소 환상의 물꼬를 튼다. 환상이 없으면 포르노만 존재한다. 디지털 소통의 재앙은 우리가 눈 감을 겨를이 없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세계를 구원하는 신의 바라봄은 오직 관조적으로 멈춰 하염없이 머무르는 사물들만 포착한다. 고요다. 고요가 구원한다.
주크박스에 관한 여담
주크박스는 사물 소음을 일으킨다. 디지털 소리는 어떤 사물 소음도 동반하지 않는다. 그 소리는 몸이 없고 매끄럽다. 주크박스가 음반과 진공관 앰프로 산출하는 소리는 디지털 소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사물적이고 신체적이다. 주크박스는 장소를 창출한다. 주크박스의 음악이 공간을 넓힌다. 공간을 창출하는 것은 사물의 본질에 속한다.
지금 사물들은 거의 죽은 채로 태어난다. 사물들은 사용되지 않고 소모된다. 오랜 사용이 비로소 사물에게 영혼을 준다. 오직 충심의 사물만 영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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