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10 December 2014

New Aesthetic

New Aesthetic


제임스 브라이들 James Bridle이 제안한 개념으로 아직 뚜렷이 정의되지는 않았지만 우선 디지털 기술의 등장으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현실에 대한 비평적 관점 정도로 이해하자.

“New Aesthetic은 예술 운동도 아니고 행해 질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이것은 멀리있는 그렇지만 겹쳐있는 우리의 현실들에 존재하는 차이과 간극을 인식하는 잡다한 네트워크의 인공물(artifact)이다.”

제임스 브라이들 자신이 속해 있는 디자인 그룹의 블로그 포스트에 2011년 처음 이 용어를 썼다. 직접적인 정의 없이 일련의 이미지로 이 개념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설명했다.

제임스 브라이들의 텀블러 The New Aesthetic은 이것의 연장으로, 글로 직접적으로 정의하는 대신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만들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아카이빙하는 것을 통해 이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2012년 한 컨퍼런스(SXSW)에서 있었던, James Bridle을 주축으로 한 패널 토론(The New Aesthetic: Seeing Like Digital Devices) 이후 이 개념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브루스 스털링 Bruce Sterling이 이 패널 토론을 참관했고 이에 관한 글, “An Essay on the New Aesthetic”을 와이어드에 발표하면서, 이 개념에 대한 더 폭넓은 관심이 일어났다.

브루스 스털링의 글을 요약하면.
  • New Aesthetic은 큐비즘처럼 리얼리티를 보는 새로운 관점이다.
  • 예술 운동이다. 발견의 단계가 아니라 실제로 뭔가를 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
  • 현대 네크워크 문화의 토산물로서 런던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디지털에서 태어났다.
  • 사실을 이야기한다. 우리를 둘러싼, 우리가 현재 만들고 있는 것들에 관한 것이다.
  • 이해가 가능하다. 당신 엄마도 이해할 수 있다.
  • 깊이가 있다. 인터렉션 디자인, 컴퓨테이셔널 미학, 감시, 군사 기술 등과 관련된다.
  • 현대적이다. 지금, 여기를 위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 새로운 새대의 것이다. 아날로그의 유산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 조잡하다. 결국은 정리가 필요하다.
  •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 기계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결국 우리 자신의 문제다. [SXSW 패널 토론에서 기계의 시각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토론의 제목이 The New Aesthetic: Seeing Like Digital Devices었다.]
  • 기계적인 동화에 미적 문제를 숨기는 것은 잘못됐다.
  • 기계가 “생각”, “기억", “시각" 등을 가진다는 은유는 기만이다. [브루스 스털링 자신은 인공지능 AI을 믿지 않기 때문에 컴퓨터의 시각 이라던지 하는 표현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 컴퓨터는 제대로된 미적 판단을 할 수 없다. 인식적, 지각적, 지적, 도덕적 면에서 부족하다.
  • 은유는 주의를 끌기위한 형의상학적 책략이다.
  • 진정한 New Aesthetic은 기계가 생산한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다루는 노력일 것이다.
  • 진정한 New Aesthetic이 입자물리연구소 CERN에 있다고 가정하면 그는 왜 일부(전부가 아니라) 수학만 “아름다운가?”와 같은 질문을 할 것이다.
  • 지적으로 솔직한 New Aesthetic이라면 글리치(glitch) 이미지 사냥보다는, 더 큰 시각으로 비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에 더 친근한 태도를 가질 것이다. 엔지니어들의 생산품에 대한 탐욕적 태도는 옳지않다.
  • 하드웨어가 우리의 삶을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심오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 기계가 생산한 이미지에 가치를 주는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의식의 상상에 가치를 두던 것과 같다. 이것은 멋지고, 기이하고, 전복적이고 도발적이지만 빈곤하다.
  • 현대의 미를 해킹하는 대신 구축해야 한다.

브루스 스털링은 이 새로운 개념을 환영하고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개념 정의에 대해 제임스 브라이들과 다른 의견도 피력하고, New Aesthetic의 방향까지 제시한다. 


개념이 모호한 탓에 많은 사람들이 브루스 스털링처럼 저마다의 해석과 의견을 내놓았다. 제임스 브라이들은 2013년 글, “The New Aesthetic and its Politics”에서 자신의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힌다.


제임스 브라이들의 글을 요약하면.
  • 내 드론 작업이 드론 기계가 아니라 이를 둘러싼 기술적, 공간적, 법적, 정치적 시스템에 관한 것이듯, New Aesthetic 역시 아카이빙한 이미지나 인용 등에서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과 분리할 수 없고 그것을 통해 존재하는 것들.
  • New Aesthetic에서 “Aesthetic”은 “미"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처럼 보인다" 정도를 의미.
  • New Aesthetic은 성명서, 에세이, 책 등과 같은 공식적인 형식이 아니라 이것이 다루고 있는 네트워크 자체-텀블러, 블로그, 유투브 비디오, 트윗 등-를 통해 네트워크에 관해 비평을 하는 것.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것에 대해 제대로 인식을 못하고 있다.
  • 아카이빙된 New Aesthetic 이미지들은 이를 생산하는 기저의 시스템,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을 드러낸다.
  • 예를들어, 위성 이미지는 맵핑의 속성에 관한 것이다. 관점과 힘의 관계, 위에서 바라보는 시점을 가진 특권, 이를 생산하는 기술을 독점적으로 가진 회사 등에 관한 이슈.
  • New Aesthetic은 아름다움이나 표면적 텍스쳐와는 관련이 없다. 이것은 네트워크된 기술의 정치와 정치화에 관한 것이다.
  • New Aesthetic은 연결들(connections)의 심오한 응집성과 다양성 그리고 네트워그 자체의 영향에 관한 것이다.
  • New Aesthetic에 대한 얕은 코맨트는 예술에 있어서 기술적인 이해도(technological literacy)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우리는 컴퓨테이션에 의해 형성되고 정의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비평가나 예술가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2014년 현재 여전히 이 개념은 모호한 채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이에 관한 논쟁을 통해, 새로운 흐름에 대한 여러 관점들이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추가 참고자료:


Saturday, 6 December 2014

기계와 감정 Machines and The Emotions

기계와 감정 Machines and The Emotions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기계가 감정을 파괴할 것인가, 아니면 감정이 기계를 파괴할 것인가. 이 질문은 새뮤얼 버틀러가 에레혼(Erewhon)에서 오래전에 제시한 바 있는데, 기계 왕국이 확장됨에 따라 이것은 점점 더 현실화되고 있다.

언뜻보면, 기계와 감정 사이에 왜 대립 관계가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보통의 아이들은 기계를 좋아한다. 큰 것일 수록, 더 센 것일수록 더 좋아한다. 우수한 예술적 전통을 가진 나라-일본처럼-들은 서양의 기계를 접하자마자 이에 사로잡혔고 가능한 빨리 이를 흉내내려고 안달이다. 교육을 받고 여행경험이 있는 아시아인이라면 '동양의 지혜'라던가 동양 문명의 전통적 가치 같은 칭찬을 듣는 것을 못 견딘다. 장난감 자동차 대신 장난감 인형을 갖고 놀라는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장난감보다는 실제 자동차를 더 선호한다. 그것이 자신을 치고 지나갈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기계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 서구인 역시 그와 같은 즐거움을 느꼈다. 소수의 시인과  심미가를 제외하고. 19세기의 세계는 기계 진보 때문에 이전에 비해 더 우월하다고 여겨졌다. 피콕은 기계 시대 초기 '증기 지성 사회'를 비웃었다. 문학가였던 그에게 있어 문명은 그리스와 라틴 작가들이 대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당시를 지배하던 경향에서 멀어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루소 신봉자들의 자연으로 회기, 호반 시인의 중세 주의, 윌리엄 모리스의 News From Nowhere(항상 6월이고 모두가 건초를 만드는 나라). 이 모두가 기계에 대해 순전히 감성적이고 근본적으로 반동적인 태도를 대변한다. 새뮤얼 버틀러는 기계에 대해 지적으로 비감성적인 경우를 파악한 첫 인물이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이것은 지적 유희 이상의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깊은 확신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당시 가장 기계화된 나라의 사람들은 에레혼의 그것과 비슷한 관점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다시말해서 그 관점은 산업적 방식에 대항하는 반대자들의 태도에서 잠재적 혹은 외연적으로 나타났다.

기계는 아름다웠기 때문에 숭배되었고 힘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가치있게 여겨졌다. 그리고 기계는 흉물스러웠기 때문에 증오 받았고, 노예를 만들어내기에 혐오 받았다. 이 중에 어떤 태도가 '맞고' 어떤 것이 '틀렸다'라고 가정하지는 말자. 소인국의 사람들이 걸리버에 관련하여 이러한 질문에 대해 논쟁하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 사람이 머리를 가지는 것은 옳고 다리를 가지는 것은 나쁘다라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일테니까. 기계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정령과 같다. 주인에게는 아름답고 유익하지만, 적에게는 흉측하고 고약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그 어느 것도그렇게 단순한 상태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기계의 주인은, 이것은 사실이다, 그것과 떨어져서 산다. 기계의 소음을 듣거나 찌꺼기 더미를 보거나 유독한 연기를 맡을 일이 없는 먼 곳에. 만약 주인이 이를 봤다면, 그것은 기계가 사용되기 전일 것이다. 그는 먼지나 열의 문제를 겪지 않은 채로 이것의 힘이나 섬세한 정확도에 감탄한다. 하지만 그가 기계와 실제로 함께 살며 작동시키는 사람의 관점에서 기계를 봐야하는 상황에 처하면 준비된 답이 있다. 기계의 작동 덕에 그 사람들이 그들의 증조할아버지에 비해 더 많은(종종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살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증조할아버지에 비해 훨씬 더 행복할 것임이 틀림없다는 점을 덧붙인다(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그 가정이란 물질적인 소유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두 개의 방과 두 개의 침대, 두 개의 빵덩어리를 가진 사람은 하나의 방, 하나의 침대, 하나의 빵을 가진 사람보다 두 배 행복한 것이 틀림 없다는 생각이다. 한 마디로, 행복은 수입에 비례한다. 소수의 사람들이, 항상 진심어린 것은 아닌 채, 종교나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생각에 대해 도전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설교로 인해 수입이 늘어나면 기뻐한다. 내가 도전하고자하는 것은 도덕 혹은 종교적 관점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심리학 그리고 삶에 대한 관찰의 관점으로부터 온다. 만약 행복이 수입에 비례한다면, 기계에 대해서 반박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 전체 질문을 검토해볼 수 있다. 사람은 육체적인 니즈가 있고 감정을 가지고 있다. 육체적 니즈가 만족되지 않을 때는 그것이 최우선이다, 하지만 그것이 만족되면 이로부터 분리된 감정이 사람이 행복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게 된다. 모던 산업 사회에는 육체적 니즈가 충분히 충족되지 않은 많은 남자, 여자, 아이들이 있다. 그들에 관련해서는, 행복에 대한 최초의 조건이 수입의 증가라는 것에 대해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에 속하고, 그들 모두에게 삶의 최소 조건을 제공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존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엄청나게 더 많이 가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가진사람들.

왜 우리는, 사실 우리 대부분은, 수입을 늘리려고 하는 것일까? 첫 눈에는, 우리가 욕망하는 것이 물질적 상품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그것을 원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에게 우월하게 보이려는 목적이다. 남자가 더 상류 지역의 큰 집으로 이사할 때에는 '더 나은' 사람들이 그의 부인을 방문하고, 이전의 빈곤한 친구들은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아들을 좋은 학교나 비싼 대학으로 보낼 때에는, 사회적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비싼 학비에 대해 스스로를 위로한다. 모든 대도시에는, 유럽이든 아메리카든, 어떤 지역의 집들은 다른 지역의 똑같은 집에 비해서 단지 유행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비싸다. 우리 열정의 가장 강력한 것중 하나는 존경(respect)받고 감탄(admire)받고 싶어하는 욕망이다. 존경과 감탄은 부유해보이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이것이 사람들이 부자가되고 싶어하는 주된 이유이다. 그들이 돈으로 주고 산 실제 물건들은 부차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좋은 그림을 볼 줄 모르는 백만장자가 전문가의 도움으로 고전 대가들의 그림을 구매했다고 하자. 그가 그 그림들으로 부터 얻는 유일한 기쁨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이 얼마나 비싼지 안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다. 그는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더 직접적인 기쁨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허영에서 오는 만족감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많은 사회에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귀족 시대에는, 탄생에 대해 존경받았다. 파리의 일부 지역에서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예술적이거나 문학적 탁월함에 대해 존경받는다. 독일의 대학에서는, 배우는 것에 대해 실제로 존경 받는다. 인도에서는 성인이, 중국에서는 현인이 존경받는다. 이러한 다양한 사회에 대한 연구는 우리의 분석이 옳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사례에서 큰 비율의 사람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한 돈에는 무관심하지만 그들의 환경에서 존경을 얻는 것의 이점에 대해서는 욕망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의 중요성은 부에대한 지금의 욕망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지 않고 다른 사회적 기관들에 의해 파괴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만약 법적으로 우리 모두가 동일한 수입을 가진다면, 우리는 이웃들에 비해 더 나아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할 것이고 물질 소유에 대한 지금의 갈망은 멈출 것이다. 나아가 이 갈망은 경쟁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경쟁자들을 따돌렸을 때만 행복을 가져 올 것이고 상관적으로 그 경쟁자는 고통을 느낄 것이다. 일반적인 부의 증가는 아무런 경쟁적 이점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어떠한 경쟁적 행복도 가져오지 않는다. 물론 구입한 물건의 실질적인 즐거움에서 오는 기쁨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본것처럼 그것은 우리가 부를 욕망하게 만드는 데 아주 작은 역할만 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욕망이 경쟁적인 한, 일반적이든 특정적이든 부의 증가에서 오는 전체로서 인간 행복의 증가는 없다.

그러므로 기계가 행복을 증가시킨다고 주장하려면, 절대적 빈곤을 막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것이 가져오는 물질적 풍요의 향상은 중요시될 수 없다. 그러나 기계가 그처럼 사용되어야 할 어떤 내재적인 이유도 없다. 인구 변동이 없는 곳에서는 기계 없이도 빈곤을 막을 수 있다. 프랑스를 예로 들 수 있다. 미국, 영국, 전쟁이전 독일에 비해 훨씬 적은 기계가 있지만 빈곤은 훨씬 적다. 반대로, 기계가 많은 곳이라도 빈곤이 클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백년 전 영국의 산업 지대와 현대의 일본을 예로 들 수 있다. 빈곤을 막는 것은 기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요소들에 달려있다-인구 밀도와 정치적 상황. 빈곤을 막는 것 외에는 부의 증가의 가치는 그리 크지 않다.

한편, 기계는 인간 행복의 중요한 조건 두 가지 즉, 자발성과 다양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기계는 그들 자체의 속도가 있고 자신의 요구사항이 있다. 비싼 기계 시설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작동하도록 유지시켜야 한다. 감정의 관점에서 기계의 큰 문제는 그것의 규칙성이다. 반대로 기계의 관점에서 감정의 문제는 그것의 불규칙성이다. 스스로 '심각하다'라고 여기는 사람을 기계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은 그에게 기계의 속성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믿을 수 있고, 시간을 엄수하고, 정확하고 등등. '불규칙한' 삶은 나쁜 삶의 동의어가 되었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이러한 관점에 대항하는 것-내 생각에는 순전히 지적인 관점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점점 기계화되어가는 것을 보는 것에 대한 건전한 공포에 영감을 받은-이었다.

실제 삶에 있어서는-사고와는 반대로-, 기계에 노예화되는 것에 대항하는 우리의 본능의 반란은 지금까지 가장 불행한 방향을 택했다. 전쟁에 대한 충동은 인간이 사회적 삶을 택한 이후로 계속 존재했지만 과거에는 지금과 같은 격렬함이나 독성은 없었다. 18세기에는 영국과 프랑스는 수많은 전쟁을 했고 세계에 대한 헤게모니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상대방을 좋아했고 존중했다. 포로가 된 장교는 상대방의 사회적 활동에 참여했고 저녁 파티에서 손님으로 대접받았다. 1665년 우리와 네덜런드의 전쟁 초기에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이 그곳의 네덜런드인에 대한 잔혹한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영국)은 그 이야기가 틀렸을 것이라고 우리 자신을 설득시켰고 그를 벌주었으며 네덜런드의 반대입장을 출판했다. Later war에서는 그에게 기사 작위를 주고 그의 진실성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은 감옥에 넣었을 것이다. 지금 전쟁의 더 큰 흉포함은 기계 탓이며 이는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첫째로, 기계는 더 큰 군대를 가지는 것을 가능케 한다. 둘째, 값싼 출판을 가능케했다. 이는 인간의 근본적인 열정에 어필하는 것으로 번성한다. 셋째, 이것이 우리와 관련한 점인데, 인간 본성의 자발적인 면으로 기저에서 작동하는 무질서(the anarchic)를 차단하여 전쟁에 대한 생각이 가능한 안도를 제공하는 것으로 어필하는 모호한 불만족을 만들어낸다. Late war와 같은 대변동의 책임을 정치인들의 책략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옳지않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그러한 설명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러시아가 대충 싸우고 평화 유지를 위해 혁명을 일으킨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국, 독일, 미국(1917년)의 경우 어떤 정부도 전쟁에 대한 요구에 맞설 수 없었다. 이러한 것에 대한 대중의 요구는 본능적인 이유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나로서는 전쟁같은 본능의 지금과 같은 증가는 규칙성, 단조로움, 그리고 현대 삶에 길들여짐이 야기하는 불만족(대부분 무의식적)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 상황을 기계를 없애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 기계와 연관된 현재의 악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단조로움에 휴식을 제공하고, 그 동안 고도의 모험을 장려하는 것이다. 알파인 등정에 자신의 목숨을 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욕망하는 것을 멈출 것이다. 가장 능력있고 활발하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중 하나는, 내가 이것을 알게된 것은 행운인데, 늘 여름을 알프스의 가장 위험한 정상을 오르는 데 보낸다. 만약 모든 남자 노동자가 일년 중 한 달을 비행기 조종을 배우거나, 사하라에 사파이어를 찾으러가거나 즉각적인 개인적 계획과 관련한 위험하고 신나는 어떤 일에 참여 할 수 있다면 전쟁에 대한 대중적 사랑은 여자에게 제한되고 없어질 것이다. 나는 이러한 계층을 평화롭게 만드는 어떠한 방법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나 과학적 심리학이 노력한다면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기계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지만 우리의 본능은 바꾸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거기에 부적응이 존재한다. 감정과 본능에 대한 모든 심리학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다. 정신분석학이 등장했지만 아직 시작 단계이다. 정신분석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행동에 있어서 사람이 의식적으로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것(ends)을 추구할 것이고 그러한 것을 추구하게 만드는 매우 비합리적인 믿음을 알지 못하는 채로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허지만 정통 정신분석은 엄청나게 많고 사람에 따라 다른 무의식적 목적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켰다. 사회적 정치적 현상이 이러한 관점에서 곧 이해되고 평균적 인간 본성이 밝혀질 것을 희망한다.

도덕적 자아-제어와 위험 행동에 대한 외부적 금지는 우리의 무질서적(anarchic) 본능을 다루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그것이 부적절한 이유는 이러한 본능이 중세 전설의 악마만큼 수 많은 방법으로 위장할 수 있고 이러한 위장의 일부는 종교적인 모습이기까지하다.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본능의 니드가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것을 만족시킬 가장 덜 해악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다. 자발성은 기계에 의해서 가장 크게 좌절된 것이기 때문에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기회이다. 기회는 개인의 계획을 위한 것으로 남겨져야만 한다. 큰 비용이 들 것이 분명하지만 전쟁으로 치르는 것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본성의 이해는 인간 삶을 진정으로 향상시키는 근간이 되어야만 한다. 과학은 물질적 세계의 법칙에 대한 의문을 해결해왔다. 그렇지만 우리가 별과 전자에 대해 아는 것에 비해서 우리 자신의 법칙에 대한 이해는 훨씬 적다. 과학이 인간 본성을 이해하게 될 때, 기계와 물리 과학은 실패했지만, 그것은 우리 삶에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Machines and The Emotions을 번역하였다.

요약
기계가 인간의 본성중 하나인 자발성, 무질서 등을 차단해버리기 때문에. 인간은 불만족을 느끼게 되고 그러한 무질서에 대한 결핍을 전쟁으로 대신했다. 기계가 가져온 삶의 변화로 기인한 인간의 부적응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삶의 규칙성, 단조로움을 없애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