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과 자연: 진화하는 양극성
Edited by Bernnadette Bensaude-Vincent and William R. Newman
1. 도입: 문제 상황
자연과 인공 사이의 경계는 점점 희미해진다. 생물학 영역의 예를 보자. 물고기 유전자를 가진 딸기, 해파리의 DNA를 이식한 빛나는 토끼, 멕시코의 “프랑켄옥수수.” 인간의 유전적 개입으로 인해 이런 생물은 “인공”이 되었나? 예전 방식으로 교잡된 잡종도 인간이 만든 것이지 않은가? 우리가 먹는 모든 토마토나 배도 “인공적” 제품인가? 그러면 우리에게 영양을 제공하는 거의 모든 과일, 채소, 고기 또는 음료가 인위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교잡과 현대 생물공학의 생산물을 “자연적”이라고 가정하면 또 문제가 생긴다. 생물공학의 생산물을 인공적이라고 하지 않으면 무엇을 인공적이라 하겠는가. 콜타르 분자를 변형해서 만든 화합물이나 염료가 DNA를 수정해서 빛나도록 한 토끼보다 더 인공적일 이유가 있을까? 컴퓨터 과학은 인간과 기계 사이의 간격을 좁힌다. “딥블루”는 체스에서 인간 챔피언을 이겼다. 카네기 멜론의 연구원들은 인간이 생물학적 몸을 버리고 컴퓨터에 의식을 업로드 하는 방법을 고안하고 있다. 이런 시나리오에서는 인공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의 선을 어떻게 그어야 할까.
최근의 생물공학과 인공지능은 자연과 인공 사이의 상식적 구별에 도전을 일으킨다. 실제로는 이 이분법은 가장 원시적인 기계와 기술의 형태에서도 명확하지 않았다. 어떤 자연물이나 인공물이건 처음에는 자연에서 추출되었다가 이후에는 인간의 목적에 따라 처리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연적이라고 생각하는 솜, 양모 또는 와인은 실제로는 화학적, 기계적 작업을 포함한 긴 제조 과정의 결과이다. 동시에 가공품도 완전히 비자연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물리적 및 화학적 시스템으로서 자연에 속하며, 만든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여러 효과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가공품의 대량생산은 점점 중요한 환경문제를 일으키며 생태계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개별적인 “자연적 제품”이 아니라 야생의 자연을 살펴봐도 완전히 자연적인 것은 찾을 수 없다. 오랜 농업 및 산업 활동으로 자연은 인간에 의해 깊이 재구성되었다. 인간에게 전혀 영향 받지 않은 “태생적 숲"이란 건 상상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의 어느 부분도 인간 기술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없다. 이는 최근의 문제가 아니다. 18세기 초에 최초의 인공 소다가 합성되었을 때와 초원에서 양이 방목되는 정원이 유행할 때, 장자크 루소는 자연의 상태는 지적인 구축이며 정치적 질서의 기초를 확고히 위한 필수적인 허구임을 분명히 인식했다. 이러한 사항들을 고려하면, 자연과 인공 사이에는 대단한 구분이 없다는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공과 자연 간의 절대적인 질적 구분 대신 점진적인 정도의 구분을 받아들일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 문화에서 이러한 구분이 어디에나 존재하고 논쟁이 지속된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다. 로알드 호프만이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에서 지적한 것처럼, 현대 화학자들이 화학물질에 대한 대중적 편견과 싸우기 위해 사용하는 '합리적' 주장들은 문화적 측면을 무시하기 때문에 대게 효과가 없다. 자연의 개념은 문화적 가치, 사회적 규범 및 도덕적 권위로서 기능하고 사용되어 왔다. 인공과 자연에 대한 논쟁은 그것들을 뒷받침하고 주도하는 광범위한 질문들을 감추고 있다. 기술은 자연 활동의 연속인가 (도구를 사람 손의 연장으로 보는 것), 자연에 대항하는 반란인가, 아니면 자연에 도전하는 것인가? 기술의 본질과 그것의 정당성, 다른 동물들 사이에서 기술자로서 인간의 위치, 그리고 사회에서 장인의 지위는 중대한 문제 중 일부이다. 기술의 영향에 대한 모든 논쟁에서 철학적 함의와 문화적 뿌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인공과 자연 간의 구분을 단순히 “대중적 편견”으로 무시하거나 “과거에 대한 비이성적 향수”로 간주할 수 없다. 오히려 새로운 기술에 대한 현재 논의의 문화적 뿌리를 파헤쳐야 한다.
과거에 대한 조사 없이 어떻게 현재 상황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은 이러한 필요에서 출발했다. 다른 시기, 다른 분야 전문가들의 인공과 자연에 대한 논의를 모은 시도가 없었다는 데 놀랐다. 이 책은 인공과 자연의 문제에 집중한 첫 번째 집단적 노력으로, 과학, 예술 및 철학의 역사학자들의 관점을 통합한다.
변화하는 경계들
이 주제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를 종합적으로 다루기는 어렵다. 서양의 인공-자연 이분법에 대한 거대한 역사 대신, 특정 맥락에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학문적이고 연대기적인 핵심 샘플들을 모았다. 우리는 자연과 인공의 개념을 다양한 시대의 과학, 기술과 철학적 및 종교적 논쟁과 대비시켜 본다. 이 선택적인 샘플 조차도 놀라운 패턴을 보여준다. 서양 역사 전반에서 인공과 자연 간의 대립 자체가 반복되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이분법이 취하는 형태는 안정적이거나 일정하지 않다. 경계는 지속적으로 도전받고 재평가된다. 예를 들어, <기계적 문제>에서 유사 아리스토텔레스는 원형 바퀴의 힘에 놀란다. 자연적 경향에 반하여 물체를 움직이게 하는 것을 확인하며, 기계가 ‘‘자연에 반하여 작동한다’’고 했다. 수세기 후 기계의 힘이 더욱 커져서 데카르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기계가 자연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자체가 기계적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인공물이 자연에 도전하는 힘이 약해지는 사례도 많다. 고대 후기 연금술사들이 금속 표면에 적용한 인공 색채는 ‘‘자연보다 우수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 연금술사들은 이러한 것들이 사기적이며 인공적이라 평가했다. 인공과 자연를 가르는 기준이 연금술의 기술적 발전으로 인해 더 높아진 것이다.
인공과 자연 사이의 이동하는 경계는 이 책 전반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영어(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언어도)에서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구별하는 명확하고 명쾌한 용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가품과 인공적인 것에서 진짜와 자연적인 것을 구분하는 풍부한 어휘를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경계상에 있는 몇가지 예들을 확인했으며, 여기에는 비자연적이고 심지어 인공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도로 수정된 생물들이 포함된다. 실제로 식물, 씨앗, 유전자 물질 및 형질 전환 동물과 같은 생물들은 여러 국가에서 특허를 받을 수 있으며, 인간의 개입의 결과로 가정하여 ‘‘발명품’’과 동일한 법적 적용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들의 인공성은 인조 가죽 벨트나 플라스틱 나무결 책상같은 것의 인공성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발광 토끼는 다른 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물이니까. 게다가 그 토끼는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과학으로 성질을 조정한 보통의 토끼일 뿐이다. 그렇다면 자연물이 어디서 자연적이기를 멈추고 인공물이 되는 것일까?
관계의 스펙트럼
인공과 자연 사이의 구별은 전통적으로 순수한 기술과 독립된 자연이라는 제한적인 사례를 고려해서 논의되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사례 중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제2권 1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침대는 자연적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침대를 심었을 때 자라거나 꽃을 피울 수 있다면, 그것은 침대 싹을 틔우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자라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침대의 모양과 구조는 인간이 자연적으로 남아있는 물질에 부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무 자체의 '자연'은 목수에 의해 부여된 인공적 형태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남아 있다. 그러나 <물리학>의 이후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명확한 구별을 해체하며, 두 가지 종류의 인공이 있다고 지적한다. 자연을 모방하는 것과 그것을 더 높은 완성도의 상태로 이끄는 것. 의사의 인공은 두 번째 종류의 예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병든 몸을 건강하게 만들지만 몸 자체의 본질적인 성질을 변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완벽화 과정은 어디서 멈추는가? 연금술의 예를 들어보면, 그 분야의 학자들은 종종 인조 귀금속을 만든 게 아니라 충분한 시간과 순수한 재료가 있었다면 지층 아래에서 자연이 만들어 냈을 진짜 자연적인 것들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이 자연보다 더 나은 금속과 광물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고, 그러한 제품들이 인간을 위한 자연식 의약품으로도 기능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제품이 자연적 인간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몇몇 연금술사들은 유리병에서의 인공적인 배양 과정을 통해 인간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의 결과물인 호문쿨러스는 기이한 지능 같은 놀라운 재능을 가질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 모든 토론은 전통적인 인공과 자연 사이의 논쟁 방식으로 표현되었으며, 연금술사들은 자신을 항상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자연을 완성시키는 자로 생각했다.
호문쿨러스 토론이 과장적이긴 해도,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침대의 예에서 취한 접근 방식의 문제점을 밝혀준다. 순수한 자연적 나무와 완전히 인공적인 침대의 사례는 중간 회색 영역을 허용하지 않으며, 호문쿨러스가 진짜 인간인지, 트랜스제닉 토끼가 진짜 토끼인지 결정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더 친숙한 예를 들어보면, 자두 나무에 복숭아 가지를 접목해서 만든 나무가 여전히 자연적인 자두 나무인지 답하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준이 적절치 않다. 이제 자두 대신 복숭아가 열리는데, 그 나무의 자연이 바뀌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이 원래 자신이 속했던 종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그것의 본질은 어디까지 변경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자연'과 '인공'이라는 범주의 본질적 상대성을 드러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상학> 제4권은 부엌에서 이루어지는 '인공적인' 끓임과 구움은 지구 내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과정과 유사하며 동일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러한 인공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자연을 모방하려는 시도에 기원을 둔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만든 것의 자연성을 주장하는 완전히 다른 방법을 열어준다. 제품 자체가 아니라 제조 방법에 집중한다면, 유리처럼 비자연적으로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자연의 생성물이라 할 수 있다. <물리학> 4권의 한 해석에 따르면, 모래와 알칼리를 함께 녹여 딱딱하고 투명한 물질로 만드는 열은 화산에서 돌을 녹이는 열과 같다. 우리가 유리를 만들 때 자연의 힘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로 보면 제품 자체는 자연적이다. 따라서 중세 스콜라철학의 한 전통은 제조된 유리가 “돌”이라고 주장하며, 대지에서 발견되는 모든 돌과 마찬가지로 자연적이라 한다.
현대인들은 종종 인공이 자연에게 행하는 행위를 고려하지 않고 인공과 자연의 차이점을 논의한다. 명사 "자연"과 "인공"은 서로의 관계에 따라 정의되기 때문에 동사가 중요하다. 인공은 자연을 모방하는가? 나타내는가? 시뮬레이션을 만드는가? 완성하는가? 자연을 개선하는가? 위조하는가? 자연을 침해하는가? 동사적 구별 외에도, 모방에 대한 일련의 개념과 용어도 특정한 문제를 일으킨다. 우리가 어떤 것이 자연적인 것의 인공적 모방이라고 말할 때, 단순히 인간이 만들었다는 사실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 다른 것이라는 걸 의미할까? 19세기 셀룰로이드와 상아의 사례를 생각해보자. 이 둘은 가짜 모피와 진짜 모피와 같은 관계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진짜라고 여겨졌고 다른 하나는 서투른 대체물, 일종의 위조품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인공 비타민 C와 장미 열매에서 추출된 자연 비타민 C는 어떤가? 이 두 물질을 ‘비타민 C’라고 부르게 만드는 아스코르빈산은 두 경우 모두 동일하다. 그 중 하나가 가짜이고 다른 하나가 진짜라고 단순히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화학자들은 자연물과 동일한 분자를 재현하고 그 사이의 동일성을 표현할 때 ‘합성'이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화학자들조차도 합성 공정으로 순수 물질을 생산할 수 있지만, 자연물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모든 불순물을 만들지는 못한다. 로알드 호프만이 지적한 바와 같이, 장미 열매에서 나온 비타민 C에는 화학자가 재현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다양한 다른 분자들이 함유되어 있다. 자연물의 불순물은 아스코르빈산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자연의 향과 맛을 재현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움을 준다. 합성 딸기나 수박 향을 맛본 사람은 그것의 주요 활성 성분이 자연물의 주요 분자와 동일하더라도 인공과 자연 이분법의 현실을 알 수 있다.
합성 유기 화합물 제품도 어느 정도는 가짜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종종 자연물을 대체하지만 모든 면에서 그것들과 동등한 것은 아니다. 보석, 천연 색소 및 의약품의 제조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합성 제품은 너무 순수해서 자연 제품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므로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인공적이다. 첫째, 인간의 개입의 결과라는 사실, 둘째, 화학적, 물리적으로 자연적 모형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성 순수 물질은 명백한 위조품인 마가린, 폴리스티렌 구슬 또는 모조 가죽과 같은 것보다 자연 모형과 더 가깝다.
상반된 관점들
‘자연적’과 ‘인공적’이라는 용어는 그들이 나타나는 맥락과 관점에 따라 매우 다른 의미를 갖는다. 물건의 '자연스러움'이나 '인공성'은 그것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할 때(자연에서 추출된 것 대 인간이 만든 것)와 내재적인 품질에 대해 논할 때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금속은 자연적이라고 간주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자연에서 추출되기 때문이고, 반면에 플라스틱은 합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공적'이다. 그러나 일상 생활과 상업적 언어에서는 플라스틱이 종종 금속보다 '자연스러운'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플라스틱이 더 유연하고 부드럽고, 열 및 전기의 전도성이 낮아 생물 조직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제품 자체나 제조 과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비슷한 충돌이 생긴다. 먼저 제품에 대해 고려해 보자. 이 경우 중요한 구분 요인은 생산자가 자연적인 제품을 의도적으로 모방했는지 아니면 자연에서 발생한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변경하여 자연에서 발견되지 않는 결과물을 만들어냈는지에 달려 있다. 제품이 어떤 의미에서 모방이라고 가정할 때도, 그 인공성의 척도는 제품과 그 견본 간의 차이의 범위에 영향을 받는다. 가짜 가죽은 합성 딸기 향료와 같은 제품과, 둘 다 자연과 분명히 다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의미에서 인공적이지 않다. 두 번째 경우에서는 과정이 결정적인 요소인데, 인공성의 범위 자체가 특정 시점에 존재하는 제조 기술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형성된다. 예를 들면, 15세기 이탈리아 화가 첸니노 첸니니는 수은과 유황으로 염화한 홍색안료와 납으로 만든 적화안료와 같은 화학적으로 생산된 물질을 '인공적'이라고 했다. 오늘날 이러한 화학물질을 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특정 생산물의 제조 공정이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면, 인공적과 자연적 간의 구별은 그 힘을 잃게 된다.
개념적, 물질적 작업
'인공'과 '자연'의 모든 세세한 뉘앙스를 여기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반적인 사항에 대해 파고들기 보다는 후속 장에서는 의학, 회화, 수집, 기계 제작, 또는 화학 합성과 같은 구체적인 작업 사례들과 '인공-자연'이라는 개념적 이분법의 상호 작용을 다룬다. 원재료와 재료를 변형시키는 기술자의 행위가 어느 정도까지 우리의 자연에 대한 혹은 삶에 대한 개념을 형성, 재형성할 수 있을까? 또는 질문을 바꾸어, 자연과 인공을 표현하는 문화적 양식이 특정 기술적 변화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의학, 연금술과 금속공학, 기계학과 자동기계 제작, 농업과 가드닝(접목), 번식(교접 및 선택), 회화와 조각, 화학 합성, 재료 기술, 사이버네틱스와 인공 지능, 유전학, 심지어 특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에서 인공과 자연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일어났다(인공과 자연, 발명과 발견 사이의 구분은 대부분의 특허 법규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이렇게 넓은 범위의 분야를 모두 다룰 수 없다. 인공 꽃에 대한 18세기의 열광이나 다윈의 자연선택과 인간의 선택 간의 비교 같은 흥미로운 주제들을 제외해야 했다. 그러나 시대에 따른 논쟁의 핵심을 형성하는 다양한 사례를 전달하기 위해 과학의 인공-자연 구분에만 제한하지는 않았다. 최근까지 '예술'로 불리던 분야- 주로 회화, 조각, 문학 등 - 뿐만 아니라 지금 '기술'이라고 불리는 분야에도 '인공'이라는 용어가 적용되었다. 이 책에서 개발된 역사적 관점의 주요 이점 중 하나는 '두 문화' 간의 최근의 구분을 너머 인공을 전통적 의미에 가깝게 복원하는 것이다. 인공의 원래 영역을 이해하지 않으면 인공-자연 이분법의 발전을 이해할 수 없다. 고전 문명은 이미 시각 예술의 사실적 묘사 기법과 시의 수사법과 같은 문제에 대해 고민했으며, 이러한 기술들은 플라톤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윤리적 문제가 있다고 여겨졌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유사한 논쟁이 연금술과 생물 공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발생했다. 각 분야에서 이러한 토론에서 나타나는 유사점과 차이점을 다룬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문명이 시작되어 현재까지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
이 책의 개요
이 책은 하인리히 폰 슈타덴의 저서 <그리스 의학의 물리와 기술>(2장)로 시작한다. 폰 슈타덴은 히포크라테스 시대의 그리스에서 물리, 즉 자연이 다양한 의미와 용도가 있었다는 관찰로 시작한다. 넓은 의미에서 자연 뿐만 아니라 개별 존재의 자연, 신체 부위의 자연, 그 부위에 작용하는 독과 치료제의 자연도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자연과는 대조적으로 질병과 싸우기 위해 약물, 식이요법 및 신체 자체의 역학 또는 힘을 사용하는 기술, 즉 의학이 있었다. 폰 슈타덴은 의학적 기술과 질병 사이의 적대적 관계가 인공과 자연의 관계 전반에 대한 놀랍도록 일반적인 설명으로 확장 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히포크라테스적 저작 <테크네에 대하여>는 베이컨학파적인 방식으로 인공이 "강제적 제약"을 통해 자연을 침해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사법적 고문의 은유를 사용하여 약물을 사용해서 환자가 체액을 배출해 자신의 신체 내부 상태를 드러낼 수 있게 하라고 권하는데, 이는 노예가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정보를 강제로 공개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연이 스스로를 밀고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인공과 자연 사이의 이 대립이 그리스 의사들에 의해 더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폰 슈타덴은 절개와 해부의 인공적인 성격 때문에 고대인들이 해부학을 발전시키기를 꺼렸음을 보여주는 자료를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해부에 대한 그리스의 금기를 거부하고 신체를 명백히 기계적 관점에서 바라본 헬레니즘 유사 에라스시스타투스의 놀라운 업적을 살펴본다. 에라스시스타투스는 엔지니어 크테시비우스가 당시 발명한 이중 작동 펌프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인간 심장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 것 같다. 이는 수천 년 후 하비와 데카르트의 발견을 떠올리게 한다.
3장, 프란시스 볼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따른 미메시스의 세가지 즐거움'에서는 기술과 물리에 대한 논의를 의학과 자연철학의 영역을 넘어 미학으로 확장한다. 월이 지적했듯이, 근대 초기 예술가들은 회화, 조각, 시에 대해 글을 쓸 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 전반에 대한 논의(기술학의 모든 분야를 포함)에서 가져온 논증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시학에서 예술을 세심하게 분리하여 별도의 범주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 연극, 시각 예술을 모방 예술로 지칭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의 존재 이유가 모방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방 예술이 다른 예술과 중요한 점에서 유사하다고 보았다고 주장한다. 우리 대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 2권 3장 등에서 전개된 네 가지 원인 이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동상의 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적 원인은 동상이 만들어진 청동이고, 능률적인 원인은 조각가 또는 그의 손이며, 형식적 원인은 그의 마음속에 있는 동상에 대한 아이디어이고, 마지막 원인은 동상을 만든 목적이라 주장한다. 볼프는 모방 예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에서 유사한 인과 체계가 암묵적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이 추론에 따르면 물질적 원인은 회화에서는 형태와 색체, 문학에서는 단어, 음악에서는 리듬과 멜로디 등 예술가가 사용하는 매체이다. 형식적 원인은 재현 대상에 대한 예술가의 머릿속에 있는 관념이고, 능률적 원인은 서사시와 드라마의 화자나 배우와 같은 재현의 주체이며 모든 모방 예술의 마지막 원인은 즐거움, 즉 모방과 모방 관찰의 즐거움이다. 따라서 볼프는 고대의 ‘예술'이라는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새로운 중요한 요소를 제공한다.
이 책의 네 번째 장인 ‘고대 기계의 예술과 자연'에서 마크 J. 쉬프스키는 고대 기계 공학자의 저술에서 예술과 자연의 복잡한 관계를 미묘하고 독창적으로 읽어낸다. 쉬프스키는 초석이 되는 유사 아리스토텔레스의 <기계적 문제>를 다루는데, 아리스토텔레스적 과학은 '인공적' 기술과 개입적 과정을 사용하여 얻은 자연에 대한 지식을 배제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쉬프스키는 그리스 역학자들이 자신들의 학문을 ‘속임수' 또는 자연 자체를 전복하는 것으로 보고, 역학은 자연을 배우는 데 바른 학습 방법이 아니라고 여겼다는 역사학자 프리츠의 입장을 비판한다. 쉬프스키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종종 인공과 자연을 정교하게 비유했으며, 때로는 둘 사이의 구분을 흐리게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쉬프스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을 모방하는 예술과 자연을 완성하거나 자연이 도달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예술을 구분한 <물리학 II>의 새로운 독해를 제시한다. 쉬프스키는 역학 자체를 자연을 완성하는 예술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고대 역학자들이 자신의 학문을 자연 및 그 산물과 필연적으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분야로 보았다는 크라트 등의 논증에 의문을 제기한다. 쉬프스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역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차적인 또는 ‘중간' 과학과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했으며, 화성학, 천문학, 광학이 물리학과 갖던 관계와 동일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주장한다. 이 새로운 관점에 대한 쉬프스키의 지속적이고 상세한 논의는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에까지 이어지는 고대, 중세, 근데 초기 역학 학자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윌리엄 R. 뉴먼의 ‘인공, 자연, 연금술, 악마: 마녀의 망치 사례와 중세 출처'(5장)는 중세 시대와 초기 근대 시대의 악마와 마녀의 힘을 결정하는 데 스콜라 신학자들과 재판관들이 연금술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아리스토텔레스적 분석으로 이끌어냅니다. 13세기 중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시대부터 스콜라 철학자들은 인간과 악마의 힘의 한계를 결정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고 세계 내에서 연금술을 시험 사례로 사용했다. 악마는 일반적으로 기술의 사용에 제한을 받는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신처럼 단순한 의지만으로 창조할 수 없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능동적인 자연 물질에 수동적인 것을 결합해야만 했다. 반면 연금술은 물질에 새로운 실체적 형태를 부여하여 종을 변화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기술이었다. 인간이 정말로 금속의 종을 변형시켜 다른 금속으로 바꿀 수 있다면, 악마도 똑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에 의한 이러한 급격한 변화가 일반적인 원칙으로 인정된다면, 악마와 그 하수인인 마녀도 새로운 형태를 부여하여 물질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며, 적에게 끔찍한 효과를 발휘하며 불행을 초래할 수 있어야 한다. 질병, 기형, 심지어 죽음까지. 연금술이 기술적인 기준으로 널리 사용된 사실은 1487년의 '마녀의 망치'로 불리는 가장 영향력 있는 마녀사냥 설명서에서 하인리히 크래머와 야코브 스프렝거가 정확히 그런 방식으로 그 기술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뒷받침한다. 이 작품은 그 이후 두 세기 동안 계속되는 대규모 마녀 사냥의 상징이 되었다.
데니스 데센의 ‘예수회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나타난 인공의 형태(데카르트에 대한 코다와 함께)’(6장)에서는 16, 17세기 예수회 해설서와 교과서에서 예술과 자연 관계의 운명이 변화하는 과정을 주로 다룬다. 예수회 저자들은 인간의 예술은 자연을 모방할 뿐이라는 점에서 부차적이고, 국소적인 움직임과 외형적인 형상만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피상적이며, 인공적인 산물에는 자연이 가진 타고난 활동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종속적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데센은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토마타 제작, 마술, 연금술과 같은 특정 예술은 이러한 평가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수회는 오토마타와 마술은 속임수나 외형적 조작이라 평가절하했다. 그런데 코임브란스는 연금술을 예술이 자연의 산물에 도전하거나 능가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물질을 공간적인것으로 축소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적 물질을 특징짓는 힘과 미덕을 제거함으로써 자연을 예술과 동일한 지위로 제한한다. 그러한 생략의 결과는 데카르트의 <디옵트리크>에서 잘 나타난다. 데카르트는 시력 향상을 위해 눈에 이식한 물관의 형태로서 사이보그 같은 인간과 기계의 조합을 규정한다. 데카르트의 아이디어는 참신하지만, 폰 슈타덴이 설명한 에라시스타투스의 기계와 의학의 융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두 저자의 기계론적 물질론과 인공과 자연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생리학의 결합은 이러한 아이디어가 단순히 우연에 의해 병치된 것이 아니라 내재적 맥락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데센의 예수회 해설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인공과 자연 사이의 명백한 대립, 즉 인공이 일반적으로 패자가 되는 상황은 토마스 다코스타 카우프만이 7장 ‘예술과 자연: 아르침볼도와 정물의 기원'에서 분석한 것처럼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그림에서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아르침볼도의 스타일은 일반적으로 회화에서 인공과 키메라적 판타지의 정점으로 여겨진다. 아르침볼도는 개별 동물을 면밀히 연구한 후 이를 환각적으로 구성하여 예술을 통해 자연을 모방하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냈다. 그의 자연에 대한 연구 기법은 똑바로 세웠을 때는 머리가 보이지만 뒤집으면 정물화처럼 보이는 특정 유형의 그림에서 탁월하게 드러난다. 카우프만은 최근에 발견된 아르침볼도의 한 그림, 즉 뒤집었을 때 과일바구니가 보이는 머리에 주목했다. 아르침볼도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동시대 사람들은 화가가 의인화된 자연과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봤다. 인간의 구성 요소로만 인간을 만들 수 있었던 반면, 아르침볼도는 식물과 그 부분을 엮어 인간을 구성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에 도전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뛰어넘었다. 예수회 작가들이 조롱했던 예술의 형상과 표면의 사용은 동일한 회화적 요소로 매우 다른 구성을 만들어내는 게임에서 자연을 능가하는 수단이 되었다.
앤서니 그래프턴이 ‘예술과 자연의 르네상스 역사'(8장)에서 사용한 출처에는 카우프만의 책에서 볼 수 있는 많은 특징이 나타나 있다. 그래프턴은 프란시스 베이컨과 토마소 캄파넬라의 기술 낙관주의를 이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의 발명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들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프턴은 기술의 진보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인 시각을 부분적으로 ‘예술과 과학의 왕실' 전통에서 찾으며, 1565년 사무엘 퀴체베르크의 ‘예술적이고 기적적인 것'의 ‘극장'과 캄파넬라와 베이컨이 묘사한 인간 기술의 목록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라프턴도 지적했듯이 예술과 자연의 상호작용은 선형적인 진보로만 볼 수 없었다. 법학자 귀도 판치롤리와 그의 해설사 하인리히 살무트는 고대인들이 소유했던 예술은 지금 사라졌지만, 어쩌면 그리스 불과 나침반같은 ‘현대' 발명품들이 이를 보충한다고 강조했다. 예술의 진화 능력과 자연을 능가하는 능력에 대한 강조는 유명한 인본주의자이자 시각 예술가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카우프만이 아르침볼도와 코마니니를 다룬 것처럼, 그래프턴은 완벽한 여성의 모습을 합성하여 예술이 자연의 창조력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알베르티의 주장을 강조한다. 예술의 힘에 대한 비슷한 표현이 피렌체 두오모 건축과 같은 공학적 업적에 대한 알베르티의 논의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 표현은 르네상스 마술의 부흥으로 전해지게 된다. 예수회 작가 가스파르 쇼트 등 아그리파와 그의 후계자들은 ‘수학적 마술'이 놀라운 기계를 통해 자연을 능가하고 심지어 압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프턴의 결론처럼, 예술과 경이의 방에 대한 문헌, 예술의 역사들, 학습된 마술에 관한 광범위한 저술은 모두 자연을 뛰어넘는 예술의 토포스에 대한 매혹을 강조했다.
호르스트 브레데캄프의 ‘라이프니츠의 자연과 예술 극장과 보편적 그림 지도책 아이디어'(9장)는 그래프턴이 멈춘 지점에서 이어간다. 브레데캄프는 현재 유행하고 있는 예술과 경이의 방에 대한 논의로 시작하여 이러한 프로토뮤지엄의 고도로 시각적인 특성과 점점 더 디지털화되는 세계의 추상적인 특성 사이의 흥미로운 대조를 지적한다. 브레데캄프가 분명히 말했듯이 예술의 방의 열렬한 애호가이기도 했던 미적분학의 뛰어난 발견자인 라이프니츠의 작품에서 그 대조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 라이프니츠를 수학자나 철학자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놀랄 수 있지만, 브레데캄프는 지식의 시각적 조직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관심을 캄파넬라, 요한 발렌틴 안드레아, 무엇보다도 얀 아모스 코메니우스 같은 작가들의 위대한 르네상스 회화적 기억 기술과 연결시켰다. 사서이자 보편 언어의 대가인 라이프니츠가 상상적으로 조직된 지식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지만, 이 주제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실로 인상적이다. 그는 어린 학생들의 두뇌에 예술과 과학을 심어줄 수 있는 그림으로 된 지식 백과사전인 ‘유니버설 아틀라스'의 계획을 25년 동안 추진했다. 브레데캄프는 라이프니츠가 수학적 추상화에 대한 애정과 함께 학습 수단으로서 시각을 강조한 것이 이미지와 알고리즘에 대한 정반대적인 사랑을 가진 우리 자신의 양극성 문화에 대한 단서를 담고 있을 수 있다며 끝맺는다.
10장 ‘스피노자, 자연과 인공에 대하여'에서 앨런 가베이가 소개하는 스피노자의 사례는 그 네덜란드 철학자가 자연의 ‘인공화'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이 주제와 관련하여 특별한 관심을 끌고있다. 이는 자연은 기계로, 신은 최고의 기술자 또는 시계 제작자로 묘사되던 시대에 다소 이례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은 가베이가 강조한 것처럼 자연과 인간의 예술을 구분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부정했다. 인간이 만든 것이든 자연에서 추출한 것이든 모든 사물은 필요성의 산물이어야 한다. 예술가의 의도조차도 자유 의지가 아닌 자연적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가비는 스피노자가 예술에 이중 언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렌즈를 연마하는 장인으로서 그는 렌즈를 단순한 자연의 필연적 산물로만 생각할 수 없었다. 정치 사상가로서 그는 국가와 정부의 인공적 성질을 주장했다. 그는 어떻게 이 모순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 실천과 개념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훌륭한 예시가 있다. 영원한 진리를 이해하고자 했던 형이상학자로서 스피노자는 인공과 자연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인간의 복지와 관련한 인공의 실천가로서 자연과 인공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상반된 관점은 예술과 자연 간의 이분법에 대한 합리적인 주장이 무엇이든 간에, 이는 모든 인간 행동에 내재되어 있으며 그것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인공 생명을 창조하는 것은 고대부터 이어져오는 오래된 관심사이며 현재에도 많은 실험실에서 추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하나의 동일한 프로젝트의 표현이라는 것은 아니다. 제시카 리스킨이 11장 ‘18세기 웨트웨어'에서 보여주듯이, 생명체와 같은 인공 생물을 만들려는 다양한 시도는 생명과 물질 또는 인간, 동물, 기계에 대한 변화하는 관점을 반영한다. 리스킨은 인공 생명체의 긴 역사에서 장인과 엔지니어들이 유물론 철학자들이 형성한 생명에 대한 기계론적 이해를 시험하기 위해 오토마타를 설계한 18세기 후반을 결정적인 순간으로 꼽는다. 자크 보캉송이나 자케 드로즈 가문에 의해 제작된 화려한 오토마타는 단순한 시계 메커니즘의 움직임 훨씬 이상이었다. 이들의 시도는 생명체의 부드럽고 촉촉한 질감을 시뮬레이션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운동, 글쓰기, 음악 연주뿐만 아니라 소화와 배변과 같은 생리적 과정도 모방했다. 리스킨에 따르면, 이러한 오토마타의 연극 공연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방 예술에 부여한 종류의 즐거움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을 속이기 위한 위조품으로 간주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리스킨은 이 기계들이 현대의 시뮬레이션과 마찬가지로 실험적 모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동물과 같은 기계라는 점에서 생명의 기계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기계에 움직임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마지막으로 리스킨은 18세기 후반의 자동차와 20세기 후반의 산업 생활이 삶의 시뮬레이션으로 개발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강조한다.
생명의 산물을 재현하려는 19세기의 시도는 존 헤들리 브룩의, ‘자연의 추월? 변화하는 19세기 유기 화학의 범위'(12장)의 주제다. 브룩은 예술이 자연에 거의 가까워지는 획기적인 단계로 회자되는 일화를 살펴본다.자연과 예술의 일치에 대한일치하는 예술의 획기적인 단계로 종종 소개되는 일화들을 다시 살펴본다. 1828년 프리드리히 뵐러의 요소 생산은 당시까지 생물체에서만 생산되던 물질을 최초로 체외에서 합성한 사례이다. 19세기 화학 교과서는 이 합성은 화학자들이 유기 화합물을 인공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했으며, 그들의 예술이 생명력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믿음을 파괴했다고 여겼다. 사실 뵐러의 합성은 생명주의나 자연에 대한 신학적 관점에 도전할 수 없었고, 도전하지도 않았다. 첫째, 뿔과 같은 유기물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완전한 합성이 아니었다. 둘째, 자연 생성물의 복제는 자연의 과정을 모방하지 않았다. 브룩은 이 유명한 합성을 인공과 자연에 대한 논쟁의 장기적 관점과 19세기 문화의 맥락에서 재조명하면서 그 영향에 대한 대안적인 관점을 발전시킨다. 합성 화학자들의 파우스트적 포부는 물질주의의 승리를 견고히 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생산품과 공정 사이,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합성물 사이의 구별을 더 크게 만들었다. 또한 브룩은 유기 합성 옹호론자들의 승리주의적 수사와 그것이 화학분야에 미친 극적인 영향 사이의 대조를 강조하며, 결과적으로 이론적 틀이 무기화학에서 유기화학으로 나뉘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유기 합성의 주창자들이 사용한 자랑스러운 표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합성은 실제로는 한 분야로서 화학의 정체성과 일관성에 변화를 가져왔다.
19세기 합성 시도로 야기된 화학 낙관주의와 20세기 말의 화학 합성에 대한 문화적 인식 사이의 대조는 놀랍다. ‘화학적'과 ‘자연적' 사이의 대립은 화학에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다. 화학 합성의 목표와 실천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어느 정도까지 화학의 문화적 이미지에 영향을 끼치는가? 13장, ‘합성을 통한 자연의 재구성: 플라스틱에서 생체 모방으로'에서 베르나데트 벤소트-빈센트는 중합, 조합 화학, 생체 모방 합성이라는 세 가지 다른 합성 전략을 검토하며 이 질문을 다룬다. 그녀는 합성 고분자가 자연을 제한된 자원의 엄격한 집합으로 볼 수 있게 하며, 이는 합성 물질의 가변성과 풍부함에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조합 화학을 통해 약을 만드는 최근 전략은 자연을 무작위 조합 과정을 통해 모은 거대한 자원 라이브러리로 볼 수 있게 한다. 이 경우에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어리석고 맹목적인 자연 선택 과정을 모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은 이로 인해 주된 특징 중 하나인 의도성을 잃게 된다. 자연을 독보적인 엔지니어로 보는 관점은 근육, 혈액 또는 거미줄과 같은 자연 재료가 갖는 다양한 특성과 유사한 인공 물질을 만드는 시도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과 예술의 개념이 상호 구성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자연과 인공은 인공물을 디자인하기 위해 사용되는 지적 및 물질적 전략에 따라 지속적이고 상호적으로 재정의된다.
따라서 이 책의 마지막 장인 14장, ‘결론'에서 로알드 호만이 상상하는 춤은 수 세기에 걸쳐 계속되고 있다. 인공과 자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파트너로서, 고대의, 동시에 현대적인, 기술-물리 구분을 이어받은 문화의 지도를 끊임없이 형성하고 재구성한다.
2. 그리스 의학의 물리와 기술
3.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따른 미메시스의 세가지 즐거움
4. 고대 기계의 예술과 자연
5. 인공, 자연, 연금술, 악마: 마녀의 망치 사례와 중세 출처
6. 예수회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나타난 인공의 형태(데카르트에 대한 코다와 함께)
7. 예술과 자연: 아르침볼도와 정물의 기원
8. 예술과 자연의 르네상스 역사
9. 라이프니츠의 자연과 예술 극장과 보편적 그림 지도책 아이디어
10. 스피노자, 자연과 인공에 대하여
11. 18세기 웨트웨어
12. 자연의 추월? 변화하는 19세기 유기 화학의 범위
13. 합성을 통한 자연의 재구성: 플라스틱에서 생체 모방으로
14. 결론
*원문: The Artificial and the Natural: An Evolving Polarity, 2007.